-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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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망설였다. 짐머만의 교수실 앞에서. 그가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김은 잘 알고 있었다. 주말이면 짐머만은 가족들과 함께 요트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요트광이다. 짐머만의 요트 세인트마리나 호를 김 그의 자서전에서 사진으로 보았었다. 저명한 현대 물리학자들과 칵테일잔을 들고 건배! 하얗게 웃고 있는 노르만계 인간들. 짐머만의 웃음은 조금 야비하게 보이는 구석이 있었지. 그러나 천재들은 의례 주인의 표정을 짓는 법이니까. 짐머만의 교수실에도 역시 그 요트의 사진이 액자가 되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정박 되어 있다. 짐머만의 요트는. 그는 주중에는 결코 집에 가지 않는다. 새벽이 되도록 연구에 몰두하는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짐머만은 짐짓 액자를 과시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말에 요트 여행을 가야 해. 그러니 미리 일들을 해치워 놔야 한다네…” 그는 연구를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신이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의 사람들처럼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인상을 결코 심어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짐머만은 노크의 주인공이 김인 것을 본 순간 아무런 감정적 동요 없이 다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면담 시간은 끝났네, 김.” 김은 마호가니 데스크 앞으로 다가섰다.
“교수님, 제가 아까 실수를 한 것이 있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찾아왔습니다.”
“핵심만을 말해보게.”
“이를 테면 이런 거죠. 혹시 저 말고 다른 연구원을 뽑은 건 아니냐고 물어보지 않은 것 말입니다. 상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할 것이라는 망상은 게임 이론에는 맞지 않으니까요.”
“… …김”
짐머만은 그제서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깨닫고 체념한 듯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위로 치켜든 눈으로 살짝 김을 바라보곤 등받이로 몸을 제껴 붙였다.
“김, 나는 자네가 에이브러험이 연구원이 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진 않는군요. 저는 이번 학기 최고 성적이었고 그렇게 강력히 일원이 되길 원했는데 말입니다.”
“알고 있네. 나의 랩에 대한 관심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그렇다면 이제 설명의 의무는 교수님에게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김… 에이브러험과 자네는 달라.”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에이브는 천재야.”
“… …”
“나는 각자에게 맞는 길을 권하는 것 뿐이네.”
짐머만의 자신의 폭력적 언사가 근거 없는 허영을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는 것을 수많은 임상적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망연히 서있는 김에게 들으라는 듯 마호가니 책상을 검지로 두어번 툭툭 두드렸다. 똑똑… 머리를 댕댕 울린다.
“김, 자네가 우수한 학생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지금은 나의 처사가 기분 나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나는 노력이야말로 최고의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지난 학기에 자네가 보여준 결과는 정말로 놀라웠네.”
“… …”
“기운 내게나. 많은 성실한 학생들이 겪는 실수는, 인생의 길이 단 한가지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물리학계의 업적을 남기는 것? 훌륭하지. 그러나 다른 훌륭한 일들도 많아. 자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색하는 시간이 바로 대학 시기라고 생각해. 자네의 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이 학문에만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경로를 찾아보게…”
“저에게 물리학을 포기하란 말씀이신지요??”
“그게 아니야. 자네가 물리를 계속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환영하네… 그러나 각오는 해둬야 한다는 거지.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 하게. 그러나 탁월함이 목적이라면 극히 가능성이 낮은 길임을 미리 알려주는 거야. 자네가 독하게 공부를 할 때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자네는 왜 공부를 하지?”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을 구축하기 위해서요.”
짐머만은 김의 답변에 어처구니가 없거나 혹은 확신한 바가 맞았을 때의 고양감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김… 아니라고… 부디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보게나.”
“… …”
“자네와 같은 우수한 성적이라면 유수한 회사에 얼마든지 입사할 수 있다네. 구글… 맥킨지… 자네의 미래는 매우 밝아.”
“제가 회사원이나 되기 위해서 이 대학에 온 것은 아닙니다. 전 본국에서 의대도 포기하고 온 것을요!”
“그래, 의사도 좋지.”
“!!!!!!”
“지난 해에도 올림피아드 출신 한국 학생이 학업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의 의대로 돌아가기도 했어. 선택은 자유야. 어떤 것도 옳고 그른 것이 없어. 인생은 물리학과 다르다네. 아니, 이 세상의 삼라 만상도 확정된 것은 없지. 그렇다면 가치란 더더욱 상대적인 것이라네.”
“교수님! 저는 아직 제가 왜 연구원이 되지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분명 에이브러햄은 저보다 성적이 낮았다구요!”
김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자 당황했다. 짐머만은 한 명의 수재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멀거머니 지켜보았다. 김은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침을 꼴깍 삼켰다. 눈물 방울이 반동을 타고 툭 – 하나 떨구어졌다. 짐머만의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김은 물기를 말리기 위해 다시 상대를 치켜든 눈으로 쳐다보았다. 짐머만은 눈길을 회피한 채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었다 내렸다. 김은 다시 침을 삼켰다. 초조한 목마름. 지진아의 우울감이 목구멍에 걸린다. 몸의 무게중심이 추욱 바닥으로 꺼져갔다.
“김… 리히터의 정리를 알고 있지?”
“당연하죠.”
“그래…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지. 정리의 증명을 위해서… 수조 분의 일까지 정확한 측정값을 보이지만 아직 이 정리가 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교수님의 주요 연구 분야죠. 이 정리의 중요성을 대중에 알린 것도 바로 교수님이구요. 이 정리 다음 단계가 바로 대통일 이론으로 이어지니까…”
“그래…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지.”
“아니요. 패러다임의 완성이죠.”
“…무엇이든간에. 우리는 문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니까.”
“… …”
“이건 리히터가 12살 때 발견한 정리네.”
“!!!!!!”
“김... 우린 바로 이 12살 꼬마의 장난에 온 인생을 바치고 있는 거라고. 이게 바로 나의 인생이고, 그리고 자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학문의 길이라네.”
“… …”
“다르다는 건 이런 의미에서 말한 것이네. 김... 결코 자네를 폄하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두게. 그래도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년에 자네를 고려해 보지.”
“…정말이십니까?”
“그래. 단, 좋은 성적을 유지하게. 2학기는 각론에 해당하니까. 본격적인 물리가 될거야.”
“…교수님!”
“왜?”
“그렇다면… 리히터는 지금 어떻게 되었죠? 어느 대학에 있나요?”
김은 종전의 충격에 온통 정신이 매몰되어 버렸다. 리히터. 엄청난 흰머리의 대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리를 하나 남긴 채 바로 사망해버린. 그 정리 이후 연구자의 종적은 전혀 들은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12살이었다니! 정리의 발표 년도를 생각해보면 그는 어쩌면 지금 내 또래일지도 모른다. 김은 고통스러운 질투를 느끼며 또 다른 의미의 타는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김의 추종이 자신에게서 제3의 누군가에게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냉소로 대답했다.
“죽었어.”
“죽었다구?”
챙은 과장된 손짓으로 방금 햄버거를 삼긴 명치를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뭐 그런 괴물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일찍 죽었기에 망정이지… 지금껏 살아있다면 얼마나 우리를 괴롭혔겠어?”
“네가 괴로울 건 뭐냐? 경쟁 대상이라도 될 것 같다는 거냐?”
대니얼은 레스토랑 테이블의 감자칩 몇 개를 집어 챙에게 내던졌다. 이소룡의 노란 츄리닝을 공부복으로 입은 챙은 그 감자들을 공중에서 손으로 격파하였다. 조각이 김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친구들의 유쾌함이 위로가 되는 터라 잠자코 있었다.
“아니, 경쟁 상대가 아니고… 야, 얼마나 공부할 걸 많이 만들었겠냔 말이야. 난 지금도 죽겠다 아주!"
학생 식당의 옆 테이블에 멀쑥한 자들이 와서 앉는다. 에이브러험과 무리들이다. 에이브러험. 같잖은 놈. 길쭉한 머리통 위로 옅은 갈색 머리가 고슬고슬 내려 앉았다. 전형적인 프레피들, 역겹구만. 사람들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들었으나 오히려 외면의 각도가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경배의 아우라! 감히 쳐다볼 수가 없네... 마침 에이브러험의 눈이 이제 막 눈길을 치우려던 김과 딱 마주쳤다. 묘한 미소… 김은 마음 속 불길이 일었으나 겨우 사그러뜨렸다. 내년이면… 그래, 내년이면 넌 내 연구논문에 이름 한 자 넣어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거야. 김은 가려진 입 사이로 이를 꽉 깨물며 웃었다.
“뭐야 이 음산한 놈, 그렇게 웃지마 김. 너 그럴 때마다 조커 같아.”
“너 다중인격이냐? 이번 점심 돈 계산할 너그러운 인격 좀 불러내 보지 그래?”
친구들은 김의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김은 이제서야 짜증난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뇌 세포 죽어 이것들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죽은거야? 차사고? 불장난?”
“그 나이 또래의 최고 사망률은 자살이지 자살…”
“그래, 아마 너처럼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했나 보다.”
“야, 성적을 비관하기엔 난 아직 받을 재산이 너무 많거든?”
“넌 그 돈 이야기 말고는 인생의 자랑이란 게 없냐? 아, 그 배의 지방질 범퍼를 간과했군.”
“제발 좀 닥쳐줄래?”
“이게 바로 미국 상류층의 표본이군.”
“프로토타입 0.0이지.”
“진화가 아예 안 된거네? 태어나긴 했냐?”
“그래도 내 DNA를 가지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구. 알아?”
“까짓껏. 다 돈세례로 보이나보지.”
"아니, 돈분수지. 내껀 미제라서 중국제랑 차원이 달라."
대니얼과 챙은 여느 때처럼 시시한 말장난들을 해댔다. 김은 고개를 내저으며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이제, 다시 공부하러 갈 시간이다. 친구들은 하나 둘 자신의 고향으로 떠난다. 대니얼은 비버리힐즈로 돌아가고 챙은 다른 대학에서 연구 제의를 받아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김은 기숙사에 남기로 했다. 휑하겠지만 친구들이 다 떠나버린 조용한 건물이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김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비행기값이 없다. 그러나 돌아갈 생각도 애초에 없었다. 아직 과시할만한 그 무엇도 구비되지 않았다. 여름이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룸메이트인 오다는 농구공과 만난 이후 거의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간혹 과제를 베끼기 위해 기숙사로 기어들어오기도 했는데, 그 사이 훨씬 수척하고 비루한 몰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말수도 부쩍 줄어 주로 침대에 누워 헤드셋으로 음악을 들었다. 지나친 정막이 방해가 되어 김은 오다의 헤드셋으로 새어 나오는 곡이 바로 그가 광장에서 켰던 곡임을 알 수 있었다. 오다는 한밤 중에 불현듯 흐느끼기도 했는데 그러고는 실성한 듯 침대를 박차고 나와 특정 멜로디를 강박적으로 켜곤 했다. 김은 도저히 참지 못하여 학기 중에 몇 번 기숙사 관리처에 오다의 퇴실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 해결되었다. 슬럼프에 빠진 비운의 천재 바이올리스트는 우울증을 진단받고 어딘가로 후송되었다. 기숙사 정문에 조용히 들어선 검은 세단은 오다를 양 어깨에서 채어서 데리고 가버렸다. 조용히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김은 약간의 수고로 고개를 창으로 향해 광경을 바라보았다. 운구차가 대학 밖으로 나갔다. 김은 마침내 죄책감을 느꼈다. 안도감에 대한 죄책감… 오다, 그는 결국 미쳤던 것이다. 그래서 김 자신에게 헛짓꺼리를 읊어댔던 게지. '나는 몸이 죽지도 영이 죽지도 않았다. 나는 살아있다. 결국 역사는 살아있는 천재에 의해서 쓰여지게 마련이다.' 김은 리히터의 정리를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단 세 줄. 그러나 수많은 천재들이 만 줄의 수식으로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과연 참인가? 왜 참인가? 내가 이 공식을 처음 써 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리히터는 이 공식을 증명해낼 능력이 없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죽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최고의 자리에서 종식해버리노라. 그게 12년에 불과하더라도! 과도한 생각이라고 김은 입술만 조금 열어 웃는다. 아니… 나라면… 나라면 그런 리히터가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을지도…
그러던 어느 날, 농구공이 굴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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