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4402
- 댓글 수 1
- 추천 수 0
새벽에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에 가까워지자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릅니다. 햇빛으로 빛나는 강을 보고 있으면 삶도 그렇게 빛나는 듯 합니다. 강연을 끝내고 다시 오후의 햇빛을 등 뒤에 두고 기차를 타고 돌아옵니다. 봄날 오후의 졸음이 엄습해 오며 나는 이내 단잠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전화벨과 긴 통화의 소음에 잠이 깨었습니다. 내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내내 전화를 받고 전화를 걸어댔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예의 없음에 대하여 분노했지만 참기로 했습니다. 추측컨대 그는 냉동식품을 취급하는 무역상인 것 같았습니다.
문득 도대체 일이란 무엇이기에 저렇게 끈질기게 저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일이란 ‘일상의 굴욕’입니다. 그들은 직장 안에서 하기 싫은 일을 견뎌야하고, 상사들로부터 자신이 바라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강요당하고, 얼마나 잘했는지 평가당하고, 상사의 멸시를 견뎌야하면서도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없는 무능한 상태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일이란 자유의 댓가를 판 품삯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일이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직업이 곧 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일을 떠나면 그 사람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소속감도 사라지고 자신의 사회적 쓸모도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존중감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일에 매달립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이란 의미와 보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살기 보다는 차라리 실업자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이란 곧 안정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라 지루할 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도전 없이 지낼 수 있고 박봉이지만 비교적 고용이 보장된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업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크게 돈, 안정, 의미, 그리고 취향입니다. 이들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직업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들 중 한 두 개를 맞추어 주는 직업을 선택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은 많이 벌지만 여가가 없는 일을 하거나, 의미는 있지만 돈은 되지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고용은 불안정한 직업을 고르게 되는 것이지요. 일은 곧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인 셈입니다.
기차가 거의 서울에 도착해 갑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렇게 잠정적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에 다시 되돌아가야하는 무엇이다. 일에 묶이지 못하면 여가도 없고 자유도 없다. 자유란 묶여 본 자들만이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일이 없으면 그래서 놀 수도 없다. 선택이 아니라 조화가 중요하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그 속으로 다른 보완적 삶의 방식을 데려올 수 있어야 한다.
‘일 따로 삶 따로’의 모습은 일이 삶에서 유리된 모습이다. 일이 삶을 지배하면 일에 중독된 것이다. 일이 삶 속으로 들어 와 통합되어야만 일은 삶에 윤택함과 보람을 주고, 삶은 일에 다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활력을 제공한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그 남자도 나도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그 남자가 열차에서 만은 전화기를 던져 버리고 봄꿈에 취하거나 강이 흐르는 창밖 풍경을 즐기고 그 위의 반짝이는 햇살을 따라 잠시 영혼이 춤출 수 있도록 놓아두기를 바랍니다.
댓글
1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4377 | 삶의 여정: 호빗과 함께 돌아본 한 해 [1] | 어니언 | 2024.12.26 | 337 |
4376 | [수요편지] 능력의 범위 | 불씨 | 2025.01.08 | 403 |
4375 | [수요편지] 삶과 죽음, 그 사이 [1] | 불씨 | 2025.02.19 | 407 |
4374 | [수요편지] 발심 [2] | 불씨 | 2024.12.18 | 432 |
4373 | 엄마, 자신, 균형 [1] | 어니언 | 2024.12.05 | 453 |
4372 | [목요편지] 별이 가득한 축복의 밤 [3] | 어니언 | 2024.12.19 | 503 |
4371 | [목요편지] 육아의 쓸모 [2] | 어니언 | 2024.10.24 | 567 |
4370 | [수요편지] 언성 히어로 | 불씨 | 2024.10.30 | 664 |
4369 | [목요편지] 두 개의 시선 [1] | 어니언 | 2024.09.05 | 675 |
4368 | [수요편지] 내려놓아야 할 것들 [1] | 불씨 | 2024.10.23 | 692 |
4367 | [내 삶의 단어장] 크리스마스 씰,을 살 수 있나요? [1] | 에움길~ | 2024.08.20 | 696 |
4366 | 가족이 된다는 것 | 어니언 | 2024.10.31 | 698 |
4365 | [수요편지] 타르 한 통에 들어간 꿀 한 숟가락 | 불씨 | 2024.09.11 | 705 |
4364 | [수요편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1] | 불씨 | 2024.08.28 | 709 |
4363 | [수요편지] 레거시의 이유, 뉴페이스의 이유 | 불씨 | 2024.10.02 | 717 |
4362 | 관계라는 불씨 [2] | 어니언 | 2024.12.12 | 717 |
4361 | [목요편지] 장막을 들춰보면 | 어니언 | 2024.08.22 | 730 |
4360 | [수요편지] 문제의 정의 [1] | 불씨 | 2024.08.21 | 737 |
4359 | 며느리 개구리도 행복한 명절 | 어니언 | 2024.09.12 | 744 |
4358 | [수요편지] 마음의 뺄셈 | 불씨 | 2024.10.16 | 7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