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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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농구공은 기숙사방 내부를 휘휘 둘러보더니 생각났다는 듯이 김에게 인사를 건넸다. “전망이 좋아. 조용하고… 네 침대는 아마 오른쪽인 것 같군.”
남자는 오다의 정갈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 일자로 누웠다. 지그시 눈을 내리감고 어깨를 침대에 비비적대는 그를 보는 순간, 김은 이 미친 작자의 낌새를 알아차렸다.
“이봐,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긴 임자가 있어.”
“알아. 오다 신이치로. 내 친구지.”
“친구? 이봐. 넌 오다를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야. 친구라니?”
김은 펜을 내던지고 책상에서 일어섰다. 김의 그림자가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지자 그는 가늘게 실눈을 떴다. 그리곤 하얀 얼굴에 빙긋 미소를 띠었다.
“만남의 횟수로 인연의 깊이를 판단해서는 안 되지. 그 뒤로 나와 오다는 꽤 절친한 사이가 됐다구. 그 친구는 나에게 이 기숙사 자리를 양도해야 해.”
“뭐라구?”
“그 녀석과 나의 약속이야. 못믿겠으면 확인해 봐도 좋아.”
“… …”
김은 오다가 우울증으로 휴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 머저리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 사이 남자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피 꺼내들어 누운 채로 입에 물었다. 그리곤 김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담배각을 들이밀었다. 김은 사물을 휙 낚아채어 손 안에서 찌그러뜨렸다. “여긴 금연이야.” 남자의 눈이 억울한 듯 똥그래졌다.
“어디에서 이 기숙사가 빈다는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꺼져.”
“이봐. 난 피해자라구. 그리고 계약에 입각해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뿐이야. 오다가 광장에서 날 만난 이후,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알아?”
“…오다가 이후에 널 찾아갔었다고?”
이거로군…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여유롭게 입에 가져갔다. “그래… 덕분에 나는 도서관 카드도 뺏기고 잠자던 기숙사실에서도 쫓겨났어.”
김은 짐작이 갔다. 과연 오다는 분개해서 이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로 했던 모양이군. 그래서 결국 이 작자가 정식 재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곤 그를 쫓아내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다에게는 마음의 위로가 되었을테지. 머저리의 말이니 신경쓰지 말자…! 그러나 정말 머저리임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김은 오다의 분노가 생각보다 컸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너 여기 학생 아니지?”
“졸업생이야.”
“거짓말 하지 마. 졸업생도 도서관 정도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구. 카드를 뺏겼다면 재신청하면 되잖아?”
“귀찮아서 그래.”
“그 소리를 지금 믿으라는 거야?”
“귀찮은 건 상대적인 거니까… 귀찮음을 증명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김은 남자의 말에 두 손을 공중에 휙 내던졌다가 그대로 공중낙하 시켰다. 미친 놈이구나 진짜… 내가 지금 왜 이런 놈과 시간 낭비를 하고 있지?
“그런 오다가 너에게 자신의 기숙사를 빌려 주기로 했단 거냐 네 말은 지금?”
“오다가 나의 의도를 오해한 탓이지. 난 정말로 선의의 충고자였어. 내가 그에게 제안했지. 바흐의 샤콘느를 도와줄 테니 이제 날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하하, 이거 원. 천하의 오다 신이치로가 기가 막혔겠군.”
“그렇지 않아. 오다는 내게 더 좋은 교환 조건을 제안해주었어. 만약 샤콘느를 내가 켤 수만 있다면 원하는 건 다해주겠다더군. 그 놈 덕분에 곤란하게 된 내 숙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자 대학 근처의 집을 알아봐주겠다고까지 했어.”
“… …”
“그래서 곡을 한 번 연주해주었지.”
“오다에게 샤콘느를 연주해주었다고?”
“응… 그리고 비브라토를 조금 더 손봐줄 테니 다음에 또 보자고 했지만 오지 않았더군.”
“… …”
“아무튼, 오다는 정말 그렇게 약속했어. 처음 조건보다 못하지만, 오다의 숙소도 꽤 괜찮으니까…”
“… …”
김은 가만히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방 안에는 야릇한 정적이 흘렀다. 이 남자, 굉장한 구라다. 어떻게 저 헛점을 파고들 수 있을까? 다짜고짜 잡소리 그만하고 나가라고 소리칠까? 아니면… 아니면… 정말 사실이라면 나는 권한이 없지 않은가? 김은 습관적으로 다시 펜을 잡았다. 그리고 문제를 풀 듯이 몇 번 끄적대다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돌아 앉았다.
“음대생이야?”
“아니…”
“그럼, 너도 오다 같은 프로디지(영재) 출신인가?”
“… …아니.”
“그렇다면 네가 오다보다 바이올린을 잘한다는 건 불가능해. 그 놈은 3살 때부터 밥만 먹고 바이올린만 켠 녀석이라고.”
“그래? 눈물겹군.”
“네가 똑똑한 건 알겠어. 어디서 글자 몇 자 주워들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넌 그냥 미친 놈일 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 …”
방학 기간에 다른 빈 방도 많으니 그냥 이 방에서만은 나가, 꺼져! – 라고 말하려던 김은, 이 남자가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가 미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잠자코 남은 담배를 다 태웠다. 그리곤 씻으려는 듯 웃옷을 걷어 옆구리를 벅벅 긁어내렸다. 훌렁 벗어낸 상체가 안쓰러울 정도로 말랐다. 분명 제대로 먹고 다니지 못한 체형이다. 김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 놈이 아니라면, 왜 저렇게 비루하게 산단 말인가? 도대체 저 놈의 정체는 뭐야?
“오다는 그저 콩쿨에 나갔던 것 뿐이야. 미스 유니버시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아니잖아? 오다보다 뛰어난 연주자라도 바이올리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세상에 드러나진 않겠지.”
“하지만 거의 불가능하지. 연습량에서 프로를 능가한다는 건.”
“그걸 그렇게 연습할 필요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어. 나는 그저 연주할 줄 알았던 것 뿐이고…”
“들으면 바로 연주할 수 있단 소리야?”
“그래. 상상한 음을 내는 데 그리 많은 노력이 들진 않아.”
“그럼 바이올리스트가 되면 되잖아! 정말 그런 거라면 세계 최고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럴 생각은 없어. 너무 쉬우니까.”
“… …”
남자는 서 있는 자리에서 옷을 다 벗어내렸다. 김은 그가 마지막 옷을 내려놓자 고개를 돌려 다시 책상의 수식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리히터를 떠올렸다. 이번 방학 동안에 고심해보기로 마음 먹은 리히터의 정리… “너나 나나 12살 꼬마의 장난질을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거라고…” 짐머만의 목소리가 각색되어 들렸다. 덧붙여 남자의 물소리가 들리고 짐머만이 사라졌다. ‘이 자식. 혹시 음악계의 리히터 같은 놈인가? 그리고 변기 커버는 올리는 거야?’ 김은 남자와 알고 지내는 것도 그리 모양 빠지는 짓거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샤워실에서 나오자 김은 그에게 타올을 던져주었다. 남자는 이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곤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난 김이야.”
“엘이야.”
“공부는 방해하지 말아주길 바래.”
“좋아…”
“그리고, 정말 금연이야.”
“알았다고.”
이렇게 엘과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은 여름 방학 동안, 자신에게 기생 생물 하나가 들어붙은 것을 톡톡히 체감할 수 있었다. 우선 엘은 결코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이 근처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 아르바이트와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엘은 냉장고에 쟁여놓은 귀한 맥주를 축내곤 했다. 김이 화를 내며 각자의 몫을 확실히 구분할 것을 주장하자 엘은 제깍 약속을 잘 지켰다. 그리곤 예의 연명적 삶을 그대로 이어갔다(그는 커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듯했다). 아르바이트에서 피곤한 채로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따는 동안, 자신만을 멀거머니 지켜보는 룸메이트를 방치하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다. 김은 결국 포기해버리곤 엘을 위해 레스토랑에서 남겨 온 샌드위치를 품에서 꺼내 던져주곤 했다. 그러면 엘은 잘 먹었다. 방학이 끝날 때쯤 엘은 확실히 살이 붙어 있었다.
엘은 낮 시간에 주로 도서관에 있는 듯했다. 그가 누구의 아이디 카드를 이용하는지는 뻔했다. 덕분에 오다 신이치로는 학기 중보다 오히려 방학 때 더욱 뻔질나게 도서관을 들고 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읽는 책은 대중이 없었다. 김은 엘의 침대맡에서 3류연애소설, 조경학, 제3세계 언어의 책 등등 무작위로 골라낸 게 분명한 책들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엘은 김의 공부를 건들지는 않았다. 그가 물리학도라는 것을 안 이후에는 흥미가 떨어진 듯 했다. 김이 엘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엘이 꽤나 조용하고 개인주의에 철저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은 엘의 메아리 같은 반응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결코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엘과 연관된 외부인은 조절되지 않았다. 깊은 밤, 엘은 스마트폰의 연락을 확인하곤 곧 옷을 챙겨입고 나가곤 했다(그는 밥은 안먹어도 폰은 있었다!). 그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면 김은 가만히 눈을 뜨곤 했다. 분명히 도서관에서 재학생인 양 굴어서 꼬드겨 낸 여자일 것이다. 김은 순진한 여자들이 한심했으나 결코 개입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들도 엘의 아름다운 몸을 즐기는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는 듯했다. 엘은 수시로 많은 여자들과 만났지만 그들 사이에 눈에 띄는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은 그 연애 기술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자신과 관련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비기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엘은 정말 잘생긴 청년이었다.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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