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337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눈이 쏟아져 온 산이 이미 다 하얀데 또 눈이 내려 그 하얌을 더 합니다. 눈 내리는 날 산으로 가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 한 분이 ‘그게 청춘’ 이라며 부러워합니다. 한참을 오르다 바위가 있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나무 밑에 서서 눈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모든 소리가 침묵하고 시간은 멎은듯한데 눈만 소리 없이 쏟아집니다. 우리를 잊고 하나의 정물이 된 듯 눈 내리는 그림의 일부로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등에 촉촉이 젖은 땀이 차겁게 느껴질 때 가지고 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눈 내리는 산의 중턱에 서서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라면발이 입술을 쪽 통과하고 국물이 꿀꺽 목구멍을 넘어가니 비로소 죽은 듯이 멈춰선 풍경이 다시 살아납니다. 밥이 있어야 삶이 즐거워집니다. 라면 한 사발에 우리는 웃고 기뻐합니다.
관조하는 풍경만으로는 삶이 턱없이 모자라고 그 속에는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없으면 삶의 모든 풍광은 죽은 것이지요. 산을 내려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반 년 만에 보는 후배 하나가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배님, 더 좋아 지셨어요. 얼굴에서 빛이 나네요.”
아주 예쁜 아부군요. 그 아부가 결심을 하게 합니다. 눈 내리는 날엔 산에 가리라. 오래 된 그녀와 함께 산에 가리라. 배낭 속에 뜨거운 물과 컵라면 하나를 넣고 하루 종일 기뻐하리라.
(며칠 전 산 속에 내린 눈은 날씨가 추워 아직 녹지 않았습니다. 아이젠 가지고 가세요)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96 | 네서스의 셔츠- 치명적 선물 | 부지깽이 | 2012.06.15 | 5154 |
395 | 사랑하는 일을 찾기 위한 열가지 질문 |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 2006.08.22 | 5155 |
394 | 시골 할아버지 | 최우성 | 2012.08.06 | 5155 |
393 | 그래도 가야 할 길 [2] | 문요한 | 2010.07.14 | 5156 |
392 | 오래된 고마움 [1] | 최우성 | 2012.03.19 | 5157 |
391 | 굿바이 외로움! | 최우성 | 2012.01.23 | 5160 |
390 | 사람과 책 | 승완 | 2012.04.24 | 5169 |
389 | 프리에이전트 독립선언문 | 변화경영연구소-문요한 | 2006.07.04 | 5172 |
388 | 사랑은 스스로를 숨길 수 없다 | 구본형 | 2006.10.20 | 5177 |
387 | 문장은 끝이 나되 뜻은 끝나지 않았다 | 승완 | 2012.02.14 | 5181 |
386 | 사막에 꽃을 피워내신 그 선생님 1 | 김용규 | 2012.11.07 | 5181 |
385 | 차별적 전문성 [1] | 문요한 | 2012.04.18 | 5182 |
384 | 내가 만난 평범한 그 사람들 [1] | 부지깽이 | 2008.10.17 | 5184 |
383 | 104년만의 가뭄 | 김용규 | 2012.06.28 | 5185 |
382 |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뜻을 품을 때 | 문요한 | 2012.06.20 | 5186 |
381 | 꽃과 꽃샘추위 | 김용규 | 2013.03.21 | 5196 |
380 | 선택회피 증후군 | 문요한 | 2007.02.13 | 5204 |
379 | 나훈아 따라잡기 | 한명석 | 2007.02.08 | 5205 |
378 |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 김용규 | 2012.09.06 | 5212 |
377 | [수요편지] 살아 있다는 것 | 불씨 | 2024.01.03 | 5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