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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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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1일 06시 35분 등록

처음으로 고양이를 고향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이틀 밤낮을 내내 울면서 졸랐음에도, 아버지는 결코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싱글벙글, 마치 손주를 보듯 아버지는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하루 종일 곁눈질로 관찰하며 ‘허어, 저놈 봐라’ 감탄합니다. 레이저 포인터를 이리저리 휘둘러 놀아주고, 간식을 주며 살짝 쓰다듬으려 합니다. 그래도 고양이가 낯설어 앙칼진 소리를 내내며 슬금슬금 도망을 치자, ‘예이놈아, 니네 집으로 가라!’ 하며 호통을 칩니다. 아버지의 토라진(?) 모습은 처음입니다.

억세고 말수가 적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어렸을 적 제가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변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많아지고 장황해졌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몇 년째 명절 때마다 반복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라면 시간 낭비라며 보지 않던 분이, 이제는 김수현 작가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드라마 속에는 인생이 담겨있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합니다.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새 양말 한 켤레. 언제나 명절이 끝나고 제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침이면, 아버지는 스티커와 철심이 고스란히 붙어있는 새 양말 한 짝을 슬그머니 내어줍니다. 어째서 그렇게 항상 새 양말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머무르다 가는 아들의 발끝까지 깨끗하길, 그 구석져 보이지 않는 곳 조차도 제일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실까요? 조금은 그 마음을 알겠습니다.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렸을 적 산처럼 크기만하던 그 모습 뒤의 초라한 어깨를 보게 되면서부터 말입니다. 허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언제나 한 발짝씩의 공간이 있습니다. 아들은 겨우 이해하게 되었건만, 아버지는 조금씩 늙어갑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달아나고, 아들은 아버지의 옛 껍데기나마 겨우 붙들게 됩니다. 어쩌면 결코 따라잡을 수 없겠지요.

돌아오던 날, 아버지는 아기 고양이에게 한숨 쉬며 말합니다.
“녀석아. 이제 겨우 정이 들만한데... 이별이구나. 잘 가거라.”

아마도 언젠가 제가 이렇게 말씀드릴 날이 오겠지요.
“아버지.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별이네요. 편히 잠드세요.”

아주 아주 슬플 그 날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부지런히 쫓아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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