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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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라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모든 감독의 임무다." - 우디 앨런
어느 헌책방이었습니다. 아내를 기다리며 먼지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 페터 빅셀의 동화책을 집어들었습니다. 갈색으로 변한 낡은 책장을 넘기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언젠가 읽었던 낯익은 것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한참 방황 중이던 사춘기 소년에겐 특별한 감흥이 없었던 평범한 이야기들이 오늘은 어딘가 달라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단돈 이천원을 주고 사왔습니다.
이 책의 첫번째 이야기는 '아무 것도 이젠 더 할 일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런 할 일이 없던 남자는 어느 날, 지구는 둥그니깐 '그냥 똑바로 걸어 가 볼테다' 라고 외치곤 지구의를 사서 직선을 하나 긋습니다. 그런데 길을 떠나기 위해 걸어갈 방향을 바라보니 다른 집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이를 꺼내 필요한 것들을 적기 시작합니다. 사다리, 밧줄, 우산, 구급낭, 겨울옷, 장화, 등산화 등등..
그러나 남자의 여행은 아직도 시작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마을 너머, 숲 너머엔 강이 흐르고 있고, 그가 그은 직선에는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필요한데, 배를 가져가려면 수레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기중기가 필요하고, 기중기를 실을 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필요한 물건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그것들을 모두 갖추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함을 계산하게 된 남자는 슬픔에 잠깁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남자를 매우 슬프게 했다. 왜나하면 그는 그동안 80세나 되었고, 그가 죽기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선 커다란 사닥다리를 한 개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다리를 올랐습니다. 누군가 '터무니 없는 짓'이라며 만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다리를 오른 그는 사다리를 끌어올리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이런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계속 떠나지 못하는 이유들이 하나 둘씩 생겨납니다.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것들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그래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슬프게도 날은 저물어 갑니다. 아무리 완벽한 여행 장비를 갖추었다 해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여행은 결코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하나의 '사닥다리' 뿐입니다. 오직 그 뿐입니다.
(2008년 6월 5일, 스물 세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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