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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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자신의 무기력증을 호소했습니다. 아무런 의욕 없는 하루가 감각을 잃은 피부를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간답니다.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고갈된 듯 하답니다. 꼼짝없이 그렇게 당하고 있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지금이 물먹은 솜처럼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조언을 원했지만 그가 정말 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닙니다. 말은 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그저 스스로 일어나 걷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 보다 조금 더 어려운 일을 주문했습니다. 말하는 대신 써 보라 했습니다.
종이와 연필을 꺼내 영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아주 긴 Wish List, 그러니까 생각나는 대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소원의 목록을 만들어 보라했습니다. 종이 위에 쓰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머리만 움직이는 것이고, 쓰기는 머리와 손을 모두 움직이는 것입니다.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육체를 가동시킬 수 있게 됩니다. 쓰기는 이미 일종의 실천인 셈이지요. 그리고 그에게는 지금 아주 작더라도 실천 자체가 중요하니까요.
그 다음 내게 하고 싶은 말도 글로 써 보내라 했습니다. 생각 보다 명료한 것은 말로 생각을 포착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말을 얻으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고, 글은 말이 종이 위에 포획된 것입니다. 글이 쓰여지는 동안 생각은 스스로를 다듬어 갑니다. 생각이 쉽게 핵심을 향해 전진하게 도와줍니다. 글은 글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가시화 능력을 뜻합니다. 우수마발을 떨어내고 핵심에 이르면 실천 강력으로 쓸 만합니다. 쓰는 동안 스스로 무엇을 해야하는 지 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글은 이미 행동입니다. 종이와 펜, 가장 강력한 행위의 도구입니다. 오늘은 써 보세요.
두려운 모든 것들을 써 보면 종이 위에 그 단어들이 나타나는 순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서운 것들이 햇빛으로 나오는 순간 우스운 것으로 변해 어이없게 하듯 두려움은 그 정체에 다가서는 순간 참을 만한 것이 되고,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하고 싶은 것들을 써 보세요. 그것은 작은 램프에 갇혀 있다가 지니처럼 피어올라 이내 경이로운 현실이 됩니다. 모든 기적이 종이 위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마치 빛나는 랜드마크도 처음 한 장의 청사진에서 시작하듯 말이지요.
오늘은 조용히 앉아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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