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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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베트남의 아름다움에 대해 쓰려고 앉았습니다. 1900여 개의 섬들로 둘러싸여 파도조차 없었던 하룽베이의 보트 위에서 본 달빛과, 작고 아담한 호엔끼엠 호숫가에 걸터앉은 사람들의 표정, 나르시소스처럼 호수를 향해 다이빙하듯 엎드려 자신을 비춰보는 나무들에 대해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한 남자의 밝은 미소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오늘은 그에 대해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에게 차갑게 대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남은 여행 경비를 소진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바삐 쇼핑하고 있을 때 그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책을 사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영어로 쓰여진 베트남 여행 책자 - 곧 떠날 사람에게 가장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요. 한마디로 "No"라고 잘라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앞장서 사냥개처럼 돌아다니며 여러 좋은 곳을 물색해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스물 여섯입니다. 네 살 연하의 아내와 돌이 다 되어가는 아들을 둔 그는 하노이에서 4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파(Sapa)라는 깡촌에서 가족을 둔 채 홀로 떠나 왔습니다. 제겐 모든 게 싸게 느껴졌던 하노이의 물가가 너무 비싸 거리에서 지내며 거지 행색을 하고 책을 주워 모아 팔고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가족을 이야기할 때 붉어진 눈을 통해 그가 떠안은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불행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에 짐을 뒤져보니 마침 한국 담배 세 갑이 있어 답례로 주겠다 했습니다. 그는 허름한 앞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하루 하나면 충분하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여행 책자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많이 보아 허름해진 책을 넘겨주자, 그는 찰옥수수처럼 듬성듬성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가 웃자 사내 뒤의 온 배경이 함께 환히 미소지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 사나이처럼 빛나게 웃고 있는가 자문해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보았던 영국 신 경제학재단(NEF)의 ‘지구촌 행복지수’ 조사 결과에서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178개국 중 102위였습니다. 돌아와 찾아보니 베트남은 열 두번째 순위였군요…
“하나가 필요할 때에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그 소중함마저 잃는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며,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 법정,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담배 세 갑은 필요 없고, 너덜너덜한 여행 책자 하나만을 원하던 빛나는 미소의 그 사내가 자꾸 생각납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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