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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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내내 책 정리를 했습니다. 이 집으로 이사온 후 몇 년 동안 매일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책들은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제멋대로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버리기를 수도 없이 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동안 몇 번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맘을 먹고 버려야할 책들을 고르다 보면 어느 새 그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나를 만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책 속에는 아주 많은 젊은 날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줄친 곳 속에서 그때의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통째로 기억하려면 50년 정도는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밤과 낮들은 이렇게 여러 흔적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몇 시간이 흐르지만 버리려고 뽑아 놓은 책들은 최근에 여러 출판사에서 보내 온 책들입니다. 나와 아무런 인연을 맺지 못한 책들, 취향과 스타일이 달라 만나자 마자 틀어진 미팅 상대처럼 아무 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는 책들만이 버려야할 바구니에 담기곤 했습니다.
몇 년간 참아온 아내가 나섰습니다. 그녀는 해결사입니다. 1/4의 책들을 박스에 담아 보관할 장소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 정도를 통 째로 비우고 나니 비로소 나머지 책들을 그럭저럭 분류하여 책장 안에 끼어 넣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일주일 내내 시간이 날 때 마다 했습니다.
그렇게 찾던 책이 여기 숨어 있었구나. 이런 책이 우리 집에 있었네. 왜 이 사람 책이 이렇게 많은거야. 그렇구나, 그때 이 사람에게 필이 꽂혔었지. 이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읽어 내고 싶었었지. 그래, 이 두꺼운 책을 옆에 끼고 6월의 장미원 그 옆, 그 빛나는 젊음 사이를 걸었었지. 이 책을 사고 참 좋아 했었는데. 이런, 이런, 이 책을 왜 두 권이나 될까 ? 하나는 분명히 내가 샀는데, 또 하나는 도대체 어디서 누구를 통해 내게 왔을까 ?
지난 일주일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오늘은 퇴근한 후에 책장을 정리해 보세요. 먼저 손에 목장갑을 하나 끼세요. 순서는 버릴 책을 먼저 골라 내야해요. 그게 가장 어려워요. 정이 많은 사람은 지난 책을 버리기 어렵고, 냉정한 사람은 새 책을 버리기 어려워요.
그러나 버리지 않고는 책장이 헐렁해 지지 않아요. 헐렁해 져야, 책들을 제자리에 분류해 다시 배치해 둘 수 있습니다. 마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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