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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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것은 고뇌와 계약을 맺는 일이다.” – 줄리 레스피나스
“사랑은 홍역과 같다.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고 지나가야 한다.” – - J.K. 제롬
고양이가 사라졌습니다. 자고 일어났는데 평소 같으면 까칠까칠한 혀로 발가락을 핥던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화장실, 옷장, 심지어 서랍까지 다 뒤졌는데도 보이질 않았어요. 맙소사! 창문 쪽으로 눈을 돌리자, 방충망이 조금 열려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가 2층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집을 나간 것입니다. 총알처럼 튀어나가 “한결아~ 한결아!” 하고 크게 불러도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얼마 전부터 ‘아우~ 아웅~’ 하며 발정을 하는 것 같더니 아이가 짝을 찾아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반나절을 찾아 헤맨 끝에 다행히 어느 자동차 밑에서 떨고 있는 아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반나절만큼의 공백에 고양이는 서럽게 울고, 품에 안은 저는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제 짝을 찾는 것이 순리인데, 자연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식구 ‘별이’를 맞이했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조그마한 여자아이입니다. 손바닥에 쏙 하고 들어가는 작은 몸짓의 아기를 안고 돌아오는데 걱정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한결이는 호전적이고 질투심이 강한 수컷이라, 예전에 다른 고양이들과 하루 종일 싸움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질투의 화신이 새로 들어온 고양이에게 보인 반응이 어땠을까요?
눈에 하트 두 개. 몸이 완전히 굳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꼼짝없이 1시간을 정지상태로 눈만 굴리며 귀여운 여자아이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홀로 구석에서 외로운 표정으로 말이지요. 누가 봐도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다가오면 ‘끄응~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틀째 뒷걸음만 치고 있습니다.
두려운 모양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암컷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할 때처럼 고통에 무방비 상태인 때는 없다” 라고 프로이드가 말했지요. 한결이도 갑작스럽게 허물어진 자아의 경계에 당황하고 놀랐겠지요. 그래서 상처를 입게 될까 두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껍질이 활짝 열린 조개의 속살처럼 다치기 쉬운 것도 없으니까요. 사랑은 너무나 슬프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야. 사랑을 두려워 마라. 아파도 사랑해라. 사랑의 보답이 오직 눈물과 한숨뿐일지라도,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해라. 시몬 데스카는 “사랑의 비극이란 없다. 다만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만 비극이 존재할 뿐이다” 라고 했다. 고통 속에서 진주가 만들어지듯, 사랑의 홍역을 겪고 나서야 너는 진정 아름다운 삶의 희극을 쓸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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