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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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길

“당신에게는 오직 한가지 생각 밖에 없다. ... 당신은 이 생각을 지닌채 태어나고, 평생 이 고정된 생각을 발전시키며, 여기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 앙리 마티스
저는 지금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끊임없이 길을 따라가는 여정이 조금 고되기도 하고,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황량한 풍광이 마음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진시황의 병마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어느 인간의 기괴하고 거대한 욕망과 그 아래서 신음하며 죽어갔을 수천, 수만의 고달픈 삶에 전율하게 했고,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강을 둘러싼 장엄한 황하석림은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중원과 서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목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하서주랑을 지날 땐 성을 쌓는 농경민과 길을 만드는 유목민의 끊임없는 충돌을 떠올리게 했고, 돈황의 막고굴의 수많은 벽화와 불상들은 문화란 결코 홀로 만들어지지 않음을, 그리고 그 연결 속에서 만들어진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던 돈황을 떠나, 서유기에 등장하는 불타는 화염산이 있는 투루판을 향하는 밤기차를 탔습니다. 길 위에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지닌 한가지 생각은 과연 무엇일까?’ 평생 숨결을 불어넣어 자라게 해야 하는 그 유일한 것은 무엇인지를 낯선 길 위에서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물어봅니다.
(2008년 8월 21일, 서른 네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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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
"비극은 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 구본형
약 열흘 간의 중국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갔던 길 위에서 저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분명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온 것 같은데, 몸이 지친 탓인지 바로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침대에 누워 잠시 뒹굴거리다보니 황하석림에서 우리를 힘들게 끌어주던 나귀 한마리가 떠올랐습니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가 끄는 나귀차를 타기가 미안했던지, 아니면 마차 지붕에 가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돌기둥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쉬웠던지, 저는 곧잘 수레를 내려서 걸었습니다. 먼지가 폴폴 나는 황량한 길을 걸으며 거대한 풍광을 올려다보는 것에 싫증이 날 때면, 같이 걸어가는 나귀의 눈을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머리를 푹 수그린 채 걸어가는 나귀의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습니다. 혹 다른 길을 가려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려 하면 여지없이 주인의 채찍질이 떨어졌습니다.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무거운 마구를 얹은 채 타박타박 걸어가던 나지막한 나귀의 등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다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듯한 일상으로 되돌아온 탓인 듯 합니다.
고된 여행의 피로와 평범한 일상의 쳇바퀴 사이, 그 삐걱거리는 틈새에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지루한 일상을 어떻게 여행처럼 반짝이게 만들 것인가? 지친 나귀처럼 무언가에 이끌려가지 않고, 새로운 길을 만들며 살아갈 것인가? 꽉 짜여진 문명의 틀 안에서 내 안의 꿈틀거리는 야생성을 잃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것인가?'
넓은 대륙을 가보니, 우리가 가진 것 중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수많은 문화 유산 중 우리에게 보다 적합한 것이 고유화되어 그 특징이 강화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실크로드의 의미 또한 그러했습니다. 동과 서 사이, 사막과 사막 사이,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새로운 것이 생겨나던 길. 실크로드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너와 나를 이어주던 그 황량하고, 때론 아름다운 길이었습니다.
답은 길 위에 있습니다. 무심코 스쳐 온 지난 길들이 그리운 풍경이 되어 가슴에 역력하게 차오르는 것을 보니 어느새 가을이 다가오나 봅니다.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저는 다시 일상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겠습니다.
(2008년 8월 28일, 서른 다섯번째 편지)
* 여행 중에 보냈던 지난주의 편지가 여러분께 가닿지 못했습니다. '잠시 집을 비웠더니, 우편함에 두 통의 편지가 동시에 쌓였나보다...' 그렇게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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