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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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자에게 편지를 한 통 쓰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편지를 담아 오늘의 편지로 삼아볼까 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기도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가는 편지 속에서 늘 내 이야기를 찾아내곤 하니까요.
J 에게
네가 빠지지 않고 올리는 '화실일기'는 잘 보고 있다.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침묵하는데, 오직 너 만이 꾸준하다. 아마 네가 가장 외로운 모양이다. 종종 느끼는 것인데 글은 대체로 외로운 사람들의 선택인 듯하다.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남을 더 많이 만난다. 자신과 대면하는 것은 좀 지루하고 때때로 슬픈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보면 그 사람과 있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지난해 연구원 수업이 늦게 끝나 택시를 타고 가다 내가 도중에 너를 떨어뜨려 준 적이 있다. 아마 한 번은 광화문 교보빌딩 앞이고 또 한 번은 종로 큰길가 어디엔가에 너를 내려 준 것 같구나. 거리는 택시를 잡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너는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후부터 너는 연구원 수업이 있을 때 마다 전철이 끊어지기 전에 혼자서 집으로 가곤 했다. 틀림없이 거리상으로는 훨씬 더 집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지만 같이 가던 택시에서 내려 홀로 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기는 더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도 종종 그와 비슷한 일이 생기는 듯하다. 제자의 손을 이끌어 그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에 더 가까이 데리고 가지만, 어떤 때는 홀로 내린 그 자리가 더욱 외롭고 힘든 자리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 외로움이 너를 위로해 줄 것이다. 자신과 만났던 그 많은 시간들이 결국 너를 구해줄 것이다. 나는 화실일기에 일일이 답을 달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늘 생각했다. 이 아이가 매일 자기의 길을 찾아 가는구나. 언젠가 환한 길을 만나게 되겠구나.
추석이 되어 하늘은 달로 가득할 것이다. 날마다 거듭나는 달이 나는 좋구나.
잘 다녀오너라. 갈 고향이 있어 좋고, 기다리는 어머니가 계셔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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