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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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시초를 안다면
사물의 끝에 대해 무지할 수 없을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지난 주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한 권은 사진작가 김영갑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란 책이고, 또 한 권은 '코스모스'의 작가로 유명한 칼 세이건과 앤 두루얀의 공저,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란 책입니다.
*
김영갑은 20대 후반, 집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가 바다와 바람과 들판과 오름의 신령한 풍경을 사진기에 담아내었습니다. 먹을 것은 하나 없어도 필름만은 꼭 사야 했던 그의 궁핍하고 치열한 투쟁의 결과는, 그 누구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제주도의 신비한 풍광이 오롯이 담긴 수많은 사진들과 근육이 퇴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루게릭 병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사진기의 셔터 조차 누르지 못하는 사진가가 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근육이 모두 사라져 바싹 마른 몸뚱아리와 목으로 밥 한 술 쉽게 넘기기 힘든 건강 상태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폐교된 초등학교에 자신의 사진 갤러리를 만듭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제주도와 사진에 바친 그의 삶이 제 가슴을 쓸쓸히 젖어 들게 합니다.
우리의 삶은 끝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다가오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록 "몇 송이의 꽃을 피우고 그러고는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질 테지만, 그 눈부신 꽃송이가 있었기에 생명은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에 등장하는 가슴 벅찬 질문으로 김영갑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을 애도해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주게.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른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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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라 주제를 중심으로 지구의 탄생부터 우리의 친척인 침팬지의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드라마를 담아낸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는 약 600페이지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며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람직한 돌연변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전자의 최적빈도'를 논하는 다음 구절이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생명의 유지란 그 얼마나 골치 아픈 개념인가! 당신이 생활 환경에 가장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바로 그 순간, 스케이트 밑의 얼음이 서서히 얇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능한 빨리 최적 적응을 회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람직한 적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의식적으로 낮추고, 강자의 겸손함을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이다."
46억년 전부터 시작된 생명의 역사에 따르면, 지구가 생기고, 최초의 생명이 탄생하고,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인간이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우연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이 비정한 생명 진화의 역사입니다. 수십억 년 전,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발버둥친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우리인 것입니다.
고바야시 겐세이 교수는 생명의 정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의 정의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나 자신은 물질과 생명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시간이 지나면 파괴되는 것이 물질, 시간이 지나면 파괴되지만 그에 앞서 늘어나기 때문에, 겉보기에 파괴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창조할 때만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철학자, 베르그손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의식이 있는 존재에게 실존함은 변화함에 있고, 변화는 성숙해짐에, 성숙해짐은 곧 스스로를 무한히 창조함에 있다."
(2008년 10월 9일 , 마흔 한번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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