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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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움’이라는 주제에 천착하여 고민한지 2년이 가까워집니다. 노력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한 오기 때문에 실명(失明)을 경험한 후부터였지요. 그 때부터 일과 사랑, 그 모두가 자기다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절묘한 인연’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들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이 흐르듯 저는 자연스런 이끌림을 좇아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사람을 대할 때면 스스로에게 묻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나와 인연일까?’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만일 인연이라면 우리 사이의 문제나 다툼이 적을 것이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영혼을 울리는 관계로 발전해 갈 테지.’
그러나 어느 관계에서든 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연일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탓에 가슴이 너무 아파 내 뱉은 말들이 급기야 큰 다툼으로 번졌지요. 상담을 자청한 주변 사람들은 “서로 인연이 아닌가 보다”라고 충고했습니다. 서서히 헤어짐을 준비할 때마다 저는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렇게 ‘나다움’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을 떠났고, 사랑을 스치듯 흘려 보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외톨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레이첼에게 작은 종이 컵을 선물로 주었다. 종이 컵은 평범했고 그 안에는 흙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꿉놀이용 찻잔으로 종이 컵에 물을 주고는 창가 턱에 올려놓았다. 할아버지가 레이첼의 손에 찻잔을 쥐어주며 말했다.
“날마다 이 잔으로 종이 컵에 물을 줄 수 있겠니? 네가 매일 물을 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단다. 날마다 물을 주어야 한다. 매일 말이다.”
레이첼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며칠 동안 종이 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며 열심히 물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을 주는 일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잊지 마라, 레이첼, 하루도 물 주는 것을 거르면 안 된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레이첼은 물을 주려고 하다가 컵 속의 흙에서 움튼 자그마한 연두색 싹을 보게 되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컵 속에는 흙만 가득 들어 있었다. 레이첼의 가슴에 감동이 벅차 올랐다.
“레이첼, 생명은 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한단다.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도 생명은 숨어 있는 법이란다.”
레이첼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그럼 생명을 자라게 하는 건 물이에요?”
“레이첼,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성실함이란다.” *
관계에서의 생명 ? 곧 인연을 싹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도 성실함임을 잊었습니다. 매일 물을 주듯 정성을 다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진짜 ‘관계 속에서의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어떤 일에 혼신을 다해 노력해본 후에야 재능을 알 수 있듯, 관계에 완전히 뛰어들어 모든 문제들에 정면으로 맞서고 극복한 후에야 진정한 영혼의 울림, 운명적인 끈을 발견할 수 있음을 몰랐습니다.
절묘한 인연이란 만들어지기 보다,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허나 ‘인연’이라는 말이 가장 추해질 때는 문제 회피용으로 도용될 때임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레이첼 나오미 레멘. ‘할아버지의 기도’ 중의 이야기를 요약

스펀지 처럼 좋은 인연들의 좋은 생각을 담아갑니다.
저는 승오님과 같은 분의 얼굴을 한 번 만나고 그 생각을 공유하게 된 것도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하지요.
인연은 인간에 대한 환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배움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모든 만남들이 인연이겠지요.
상대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고 서로 인간으로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인연이고요.
상처를 주는 사람이 인연이 아닌 것이 아니라 그런 인연이었던 것이 겠지요.
또는 더 큰 깨우침을 선사하는 스승일지도..
인간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면
완벽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그러한 인연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만 않는다면
좋은 인연을 묵묵히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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