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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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화살나무, 사진 - 두산 백과사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듭니다.
" 달이 너무 밝아요. 회사에서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걷고 있어요. 참 좋아요. 그래서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
그녀는 늘 그렇습니다. 작은 것 속에서 감탄을 찾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로 부터 문득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전화를 타고 흐르고 문자로 찾아오고 이메일로 보내집니다. 가끔은 직접 꽃이나 산을 그린 봉투에 초록빛 잉크로 편지를 적어 보냅니다.
몇 년전 우리는 여럿이서 터키 여행을 갔었습니다.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샤프란불루 어디를 가든 낯설고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 마다 그녀는 우체통을 먼저 찾습니다. 누구에게 가는 편지 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자기가 본 좋은 것들을 전하기 위해 늘 달려갑니다. 좀 특이한 사람이지요. 어쩌면 좀 이상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웠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시인으로 태어난 듯 합니다. 아직 한 권의 시집을 낸 적도 없지만 그녀는 시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몇 사람이 그녀의 신혼집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디자이너 초년생인 동생이 몇 벌의 신혼 옷을 직접 만들어 주었는데, 그녀는 방 안에서 한 벌 씩 입고 나와 패션쇼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박수를 치고 큰소리로 웃었지만 사실 더 즐거워 한 것은 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축제를 스스로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정성에 보답할 줄 아는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결혼을 하고 1년 쯤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느 봄날이었나 꽃이 아름다운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녀의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가슴을 풀어 아이에게 젖을 먹입니다. 젊은 엄마들은 이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아이를 키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아들인 윤섭이를 꿈섭이라고 부릅니다. 그녀에게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함께 있으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듯 착각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있는 곳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지금 보다 훨씬 훌륭한 곳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치에 정성을 다하고 그 가치에 어긋날 때 여린 몸으로 세상에 맞서려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이 그녀의 특별함입니다. 그녀는 시인입니다.
가끔 한 두 편씩 써 우리에게 보내지는 시들을 읽으며 우리는 '아침 노을'과 '전통 속에 담긴 화살' 같은 이미지를 얻어냅니다. 언젠가 훌륭한 시집 한 권이 그녀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올 것입니다. 언제가 될 지 몇 권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훌륭한 시집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이 곧 시니까요. 나는 삶보다 아름다운 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그 속에 모든 것을 다 안고 흐릅니다. 다 흘러 이윽고 바다에 이르게 되는 데, 바다란 모든 것을 다 담고도 파랗습니다. 바다는 그래서 삶을 닮았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좌절과 희망과 모욕과 승리를 다 담고도 여전히 푸른 삶처럼 그녀의 시집도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