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형
- 조회 수 4630
- 댓글 수 4
- 추천 수 0
냉정하고 따뜻한 패러독스
그는 옷이 참 잘 어울립니다. 특히 파란색 옷을 입으면 아주 멋집니다. 얼굴이 하얗고 잘생겼습니다. 키도 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체형이 갸름합니다. 중년의 사내들에게 잘 보이는 칙칙한 피부와 커다란 똥배가 없습니다. 여인들이 보면 누구나 좋아할 만큼 핸섬합니다. 정신과 의사일 뿐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쓴 책은 마치 빙산과 같이 아직 다 그 역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좋은 책을 써내게 될 것입니다. 말도 아주 잘합니다. 그러니 그는 부러울 만큼 아주 많은 것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내가 보기에 정말 그의 매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가끔 떠도는 구름 같은 허무와 슬픔의 흔적입니다. 나만 그렇게 본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푸르고 맑은 하늘에 떠 있는 흰구름이 하늘의 청명함을 가리는 대신 그 맑음을 더 해주듯, 그 영혼의 구름이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그 구름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는 행복한 많은 것을 타고난 세속적으로 부러운 사람으로 그쳤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구름 때문에 그는 많은 외롭고 좌절하고 무기력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프기 전에 자신의 삶에 주도적이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훌륭한 멘토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주변의 크고 작은 상담거리가 생기면 가끔 그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 사람이 술을 너무 마신다는구나. 누군가 마음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구나. 이 일을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어보곤 합니다. 내가 그의 의견을 물어 보는 것은 그의 의견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에게도 좋은 방법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내 스스로 아직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나에게도 의논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옆에 있으면 든든합니다. 사려깊고 현명한 제자를 대동한 선생이 그로 인해 덩달아 의기양양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하얀 얼굴과 파란 셔츠처럼 냉정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위해 아무 말없이 기꺼이 혼자 파티를 준비하여 챙겨줄 만큼 세심하고 따뜻하기도 합니다. 내게도 해마다 년말이 되면 잊지 않고 소박하고 간결한 그림이 있는 좋은 달력을 일부러 사서 보내 줍니다. 올해는 화려한 달력을 보내 주었으면 합니다. 육체의 기쁨과 생의 환희가 가득한 그런 그림이 좋아졌습니다. 그동안 관조적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종 탱고 속의 어떤 동작들이 삶의 단명함에 대한 지극히 슬픈 아름다움으로 뼈속으로 스며들 듯, 영원함에 대한 갈구와 오늘이라는 찰라적 실존에 대한 치열함이 만나 화약처럼 폭발하는 밤하늘의 폭죽 같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삶의 딜레마와 패러독스들이 삶을 괴롭히기는 커녕 훨씬 더 흥미진진한 놀이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입니다.

때로 이 이는 누구일까 하고 짐작하는 것도 재미있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이지만 마치 내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짧은 편지 글속에 그 사람에 대해 소장님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어 참 쓰기 어려운 글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한 편 한 편 이어지는 글들을 보며
소장님이 이들에게 갖는 찐한 애정도 듬뿍 느껴지고,
소장님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느껴집니다.
이 편지가 오래오래 계속되어서
나도 언젠가 저 편지글속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
... 는 생각을 하는데
사~알짝 우울해지네요..^^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577 | 참 좋은 한 해, '마음을 나누는 편지' 새로운 필진을 소개합니다. [5] | 구본형 | 2009.01.02 | 4152 |
576 |
감사합니다.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 | 문요한 | 2008.12.30 | 4403 |
575 | 쉰 한 번째 서툰 편지 [15] | 박승오 | 2008.12.29 | 4805 |
574 |
아주 민감한 고성능 포착 센서 ![]() | 구본형 | 2008.12.26 | 3891 |
573 | 소라 고둥 껍데기 (the shell) [14] | 김도윤 | 2008.12.25 | 4551 |
572 |
당신의 나이에 0.7을 곱하라 ![]() | 문요한 | 2008.12.23 | 4924 |
571 | 사부(師父), 구본형 | 박승오 | 2008.12.22 | 3331 |
570 |
세 가지에 뛰어난 인물 ![]() | 구본형 | 2008.12.19 | 4614 |
569 | 내가 넘어진 곳 [1] | 김도윤 | 2008.12.18 | 3275 |
568 |
스스로 멍에를 짊어진다는 것 ![]() | 문요한 | 2008.12.16 | 8001 |
567 |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거라" ![]() | 박승오 | 2008.12.15 | 5275 |
» |
냉정하고 땨뜻한 패러독스 ![]() | 구본형 | 2008.12.12 | 4630 |
565 | 노란책 두 권 [2] | 김도윤 | 2008.12.11 | 5008 |
564 |
자기검열에서 벗어나라 ![]() | 문요한 | 2008.12.09 | 7677 |
563 | Good & Bye | 박승오 | 2008.12.08 | 3924 |
562 |
내 꽃도 한 번은 피리라 ![]() | 구본형 | 2008.12.05 | 5341 |
561 | 소명의 발견 [2] | 김도윤 | 2008.12.04 | 3669 |
560 |
누군가 당신에게 태클을 걸어올 때 ![]() | 문요한 | 2008.12.02 | 7717 |
559 | 젊음이 두려워하는 이유 | 박승오 | 2008.12.01 | 4924 |
558 |
빨강머리 앤 ![]() | 구본형 | 2008.11.28 | 5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