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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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 -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책상에 앉아 한 해를 되돌아 보니, 변화경영연구소의 문을 처음 두드리던 작년의 봄날이 생각났습니다. 출렁이는 남해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근거리며 들었던 사부님 말씀도 떠오릅니다. 그 때 사부님께선 이런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올 한해 여러분은 나와 책 속의 여러 저자들을 바라보며 여행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면 (자리에서 물러나시며) 저 푸른 바다를 향해 각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작년은 매주 책을 읽고, 만만치 않은 분량의 리뷰와 칼럼을 쓰느라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대상과 목표가 있었기에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올 한 해는 그저 눈 앞에 새파란 바다만이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하도 광활하고 막막하여 차마 바다로 뛰어들 엄두가 안 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파도가 부서지는 하얀 모래톱을 이리저리 서성였습니다.
저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때로는 편리하지만, 결점 또한 많습니다. 어떤 문제를 접하게 되면 마음 속에 상(象)이 떠오르기 때문에 남들보다 문제 풀이가 빠르다는 장점은 있지만, 처음 떠오른 이미지의 경계를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문제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풍경들에 머물게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약점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보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보통은 하나의 형상이 떠올라 이에 의지해 어둠 속을 헤쳐 나가지만, 만일 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올해 제가 쓰고자 선택했던 책의 주제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계속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 속에서 모호하게 떠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텅 빈 풍경 속을 하릴없이 거닐 던 중, 파도가 쓸고 간 자리에 놓여진 소라고둥 껍데기를 발견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저 바다 위를 헤엄쳐 가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작디 작은 소라 고둥 껍데기 안에 머물고 있었구나. 사방에 경계를 만들고,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안을 맴돌고 있었구나. 세상 곳곳의 풍경과 함께 떠도는 줄 알았더니 그저 스스로 규정지은 딱딱한 소라 고둥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을 뿐이구나. 이 좁디 좁은 껍질이 내 영혼의 집이자 세상이었구나."
해가 저무는 막막한 바닷가에서 저는 외로운 동네 꼬마가 지어놓은 모래성처럼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상하게도 슬프지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음 한 구석에서 알 수 없는 기쁨 같은 것이 퍼져 나갔습니다. 마치 앞으로 탐험해야 할 미로의 입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이제 보잘 것 없는 소라 고둥 껍질 뿐이니,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치던 이 곳에서 다시 시작하리라는 작은 용기 같은 것이 솟아 올랐습니다.
처음 여행을 시작하던 그 날로부터 두 해 째,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니 산다는 것은 한번에 멋진 그림을 그려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때론 막막한 어둠 속을 걸어야 하고, 때론 서툰 선들을 끊임없이 그려보아야 하는 것이란 것임을, 그 무수한 선들 속에서 하나의 형상이 떠오를 때가지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경계를 넓혀 나가야 하는, 소라 고둥을 닮은 나선의 여정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꿈꾸며 산다는 것은 그렇게 현실과 꿈 사이의 벼랑 끝을 걷는 듯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내년 한해는 바닷가의 소라 고둥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깊고 넓은 바다로 나아가야겠습니다.
P.S. 오늘이 제가 여러분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끝은 늘 정해있는데 사람은 때로 그 끝을 잊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봅니다. 비록 편지로나마 여러분과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한 해였습니다.
다음에는 오늘보다 더 나아진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바라며,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사는 2009년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8년 12월 25일
김도윤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이 가 닿을 수 없는
아주 섬세하고 예술적이고 비밀스런 언어와 이미지의 세계를 갖고 있다고 느끼곤 했어.
그러니 도윤은 이미 자기 세상을 가진 사람이야.
하지만 그 세상에 관심이 있는 나조차
스쳐 지나갈 수 밖에 없었지.
내가 갖고 놀 만한 도구,
혹은 같이 놀 만한 만남의 광장 같은 것을 만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야.
시기적으로
아직 모든 시선과 화살이 자신의 내면으로 쏠려 있을 때라고 이해해
앞으로 더욱 곱씹고 더욱 깊어져
세상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다면
도윤의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질 거야.
그동안 수고많았고,
더욱 자신의 세상을 후벼 파기 바래.
무엇이 되었든,
도윤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 안에 안주하진 않을 거야
우리들 정신의 외연을 넓히는 사람,
새로운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될 거야.

도윤씨가 궁금했어요.
만나지 않아도 그 글을 읽으며,
도윤씨가 여행을 하면 왠지 나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았고,
쓸쓸함을 느끼는 날은 문자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도는 듯 했거든요.
어떤날은 독자로서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한 번도 보내지는 못했네요.
송년회에서 만나 반가웠고. 왜 그런글을 쓰는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책을 내는 시한을 너무 멀리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독자로서 해 봅니다.
좋은 소식이 오면 제일 먼저 가서 책을 사보겠습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도윤씨의 독자들이 많겠지요.
새해, 강건하시고, 건필하시길 기원합니다. 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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