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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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처음으로 쓰려고 자리잡고 앉으니 엉뚱하게도 어릴 적 교과서에 실렸던 이솝 우화의 한 토막이 떠올랐습니다. 너무 오래 전이라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략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렇습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던 너구리와 여우는 땅에 떨어진 빵을 발견합니다. 서로 먼저 보았으니 자기가 먹겠다고 우기던 둘은 결국 원숭이를 찾아갑니다. 똑똑한 원숭이는 거침없이 빵을 둘로 나누고는 한 조각씩을 나눠줍니다. 그러자 너구리가 먼저 불만을 터트립니다. 여우의 빵이 더 크다는 거지요. 원숭이는 당황하는 대신에 여우 몫의 빵을 한 입 덥석 베어 뭅니다. 그러자 이번엔 여우가 목소리를 높입니다. 원숭이는 다시 너구리의 손에 들린 빵을 한 움큼 잘라냅니다. 이렇게 몇 번을 오가자 빵은 흔적도 없이 원숭이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다투지 말고 잘 지내라는 의미에서 이 이야기를 교과서에까지 실었던가 봅니다. 어린 아이였던 저는 원숭이가 무척 고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도 싶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제게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일은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연구원이 되어 100권 남짓 책을 읽었고, 100꼭지쯤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법 두툼한 동양고전 한 권을 힘껏 번역했습니다. 단 하루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둘 사이의 괴리는 점차 잦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앞으로 일 년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제 마음 한 조각을 많은 분들께 전할 수 있는 놀라운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루의 혁명과 눈부신 도약, 아마도 이것이 제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빵이었던 모양입니다.
딱 그만큼의 시간 동안 체중이 15킬로그램이나 불었습니다. 1.0 언저리를 오가던 시력은 0.5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거기다가 얼마 전에 받았던 건강 검진에서는 간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는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제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던 탓에 생긴,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제 막 4살이 된 아들 아이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이 녀석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공부’와 ‘번역’입니다. 뭐라도 좀 해볼까 싶어 방으로 숨어들라치면 벼락처럼 울어댑니다. 소소한 일상과 그 속의 작은 행복, 이것이 제가 왼손에 쥐고도 한동안 돌보지 못한 다른 한 조각의 빵이었던가 봅니다.
균형은 두 개가 정확하게 똑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많은 쪽을 덜어내고, 모자란 쪽을 채우는 끊임없는 노력이 바로 균형인 거지요. 상대의 빵이 더 크다고 불평하는 너구리의 말에 거침없이 여우의 빵을 베무는 원숭이처럼 말입니다.
지금 오른 손에 들고 있는 당신의 빵은 무엇입니까? 반대편 손에 쥐고 때때로 흘끔거리는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한 쪽에만 너무 매달려왔다면 슬그머니 다른 쪽에도 마음을 나눠주세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며 아주 멀리 가게 될 것입니다.
한 해가 넘도록 매달려온 번역 원고의 수정을 조금 전에서야 겨우 마무리했습니다.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들 녀석이 좋아할 작은 주말 계획을 하나 꾸며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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