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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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산
사진 속 그네들은 내 눈물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꺼내어 울어버릴 울음통이다. 그들에게 사랑을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날아가버릴 가벼움이 될까 두려웠고 아픔에 견주기엔 존재 자체가 이미 기쁨이었다. 정상에서 그들을 내어 들고, 말없이 흐르는 눈물이 하염없다. 살아주어 고맙고 살려주어 감사하다.
■ 2010. 05. 17 오전 10:50분경 정상에서 가족과 함께. 8,848m 에베레스트
밥보다 꿈인 이유는 그들에 대한 내 불꽃이 결코 사위어가지 않음을 승인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밥에 틀어 막혀 졸렬함에 말라 비틀어진 무색 빌딩에서 보낸 시간이 내 원형의 시간은 분명 아니다. 새벽에 출근하고 밤이 다되어, 녹아 흐르는 척추를 애써 곧추세우고 현관문을 부여 잡는다. 그것이 그들을 위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 않은가. 꿈 없이, 그들을 건사하는 데만 열중하여 소 같은 묵묵함이 전부였던 삶에 찬사를 보내줄 이는 아무도 없다. 이기적인 내 꿈이 그들을 잠시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꿈 없이 사는 삶은 내 삶과 그들에 대한 내 불씨를 모조리 꺼버릴 수 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삶은 싫다. 불꽃이 아니라면 다른 꽃들은 사양한다. 삶이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현실은 꿈을 파괴하지만 꿈도 현실을 부수어 낼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긴다. 그들에 대한 내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이리라. 그래, 그들을 데려가자. 사진으로라도 데려가자. 보고 싶을 때 목놓아 울어버리고 그리울 때 고함 치리라. 산이 높을수록 내 가슴이 요동치는 것처럼 그들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나는 오르리라.
그러나 히말라야, 그곳은 나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간이 나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땅이었다. 18억 년 동안 검은 벽이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만년도 더 된 눈이 산을 덮고 있었고 수천 년 전 녹아 내리기 시작한 회색의 빙하가 흐르고 있었다. 마른 바람이 휑하니 불어온다. 그 바람은 또 언제적 바람이던가. 어지럽다. 시간 없는 인간이 존재 너머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어지럽다. 머리 속은 어지럽고 거북한 속에 배를 부여 잡았다. 그리고는 무표정하게 쏟아낸다. 눈은 풀리고 벌어진 입에서 끈적하게 떨어지는 침을 바라보는 일은 무참하다. 먹은 것이 없어 더 쏟아낼 것도 없고 다 쏟아내어서 또 쏟아낼 것이 없는데 내 오장육부가 입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싶은 건지. 괴롭고 괴로워 지을 표정이 없다. 나는 입으로 먹어야 살 수 있는 인간이었다. 피와 살이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드디어 알아 차린다. 까불지 마라, 그리고 겸손 하라.
나의 지난 시간이 부끄럽다. 아는 것이 진실인 양 떠들고 다녔고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을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내 것이라 생각했고 내가 가진 물질은 내 것이라 여겼다. 내 사유가 유일한 것처럼 말했고 더 채우지 못해 혈안을 하였다. 피를 토하고 쓰러질 일이다.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 온다. 뜨거움에 몸서리 칠 무렵 태양은 붉게 일몰한다. 떨어지는 석양이 아프다. 내 부끄러움을 안고 떨어지는 연민에 아프고 기진한 내 육신이 같이 사그라들까 두렵고 그 두려움이 수치스러워 아프다. 겸손 하라. 까불지 마라.
라마제가 끝나기 전에는 산을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셀파들은 지혜롭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치욕을 신 앞에 서서 씻어내기 전에는 시간 너머의 세계로 들어서지 않는 것이다. 한 낮에 뜨거웠던 태양이 사라졌다. 내 부끄러움을 그것과 함께 떨구어 낸 다음 히말라야는 동토로 급변했다. 비로소 나는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묻자. 나는 왜 오르는가. 나에게 오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신에게 고하라. 물음이 끝나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여선 안 된다.
4/11
라마제를 지내는 날이다. 10시에 제를 지내기로 했는데 아침 일찍부터 셀파들은 분주하다. 미리 쌓아놓은 제단 앞에 각종 음식과 비스켓, 맥주를 올리고 향나무 연기를 피워 제사 분위기를 한 층 고조 시킨다. 신과 같이 둘러쳐진 흰 산들 속에서 신을 부르고 있다.
내일 원정대는 역사적인 첫 등반을 시작한다.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등반을 하기 전 미루어 둔 회계 정산을 마친다.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가 돈 계산 때문에 깨질 듯 하다. 라마제가 끝나고 셀파들과 함께 산소마스크, 식량, 장비 등을 최종 check를 했다.
* 본격적인 등반에 앞서 카라반 비용을 정산해 두어야 훗날 복잡하지 않다. 라마제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된 회계 정산은 저녁 식사 전까지 이어졌다.
- 카라반 시작 전 선급금 250,000루피
- 카라반 기간 중 총 소요금액 270,725루피(대원+셀파들의 숙박, 짐 운송, 식사 등)
- 추가 정산 지급 20,725루피
왜 오르는가? 떠남은 원초적 유혹이다.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다. 이 기대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유혹했다. 인간의 역사는 이 유혹에 넘어가 홀연히 떠난 이들의 역사다. 길을 떠나고 현실을 떠나고 일상을 떠나는 데서부터 역사의 변곡점은 시작되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척박한 토양을 떠난 그리스는 문명을 일구며 지중해를 제패하지 않았나)
그러나, 떠난 자는 반드시 돌아간다. 떠난 이들은 다시 돌아가는 것을 목숨과 같이 여겼다. 트로이 전쟁 10년을 치르고 고향인 이타카 섬으로 돌아가기 위한 눈물 겨운 오디세우스의 10년 행로는 3천 년 간 인간의 사유를 지배했다. ‘인간은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에서 나와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돌아온다. 먹기 위해 싸고 싸기 위해 먹는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고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사랑은 미움을 동반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채우기 위해 버리고 채우려 버린다.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이 빌어먹을 순환은 저주에 가깝지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원형이다. 그 소모적 삶을 끊임 없이 반복하는 인류의 행위는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가는 길이다.
내 오름은 나에게 가는 길이다. 떠남이 돌아옴을 전제한 여행이라면 오름은 내려옴을 전제한 일탈이다. 새로움 없이 진행하는 일상은 인간에게 떠남을 부추기고, 평범을 기웃거리는 존재는 나에게 오름을 추동한다. 나에게 오르는 것은 내가 원초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영웅이 될 수 없는 자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영웅놀이인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보 잘 것 없지만 나의 신화를 만들고 싶었다. 산의 마루금에 찍힌 내 발자국은 왜소한 내 존재가 제 자신의 신화를 찾으려는 외침이다.
역사학자 윌 듀런트가 ‘남자는 여자가 기르는 마지막 가축’이라 한 말은 옳다. 야생을 죽이는 울타리를 머리로 들이 받으며 제 운명은 야생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 언젠가 바스러질 뼈는 중력을 배반하며 뛰어라 하고 썩어질 근육은 화끈한 수축을 목말라 한다. 야생이 내 원형의 모습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내 남자로서의 정체성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울타리를 넘으려는 무모한 시도를 할 것 같다. 내 삶이 임시성이 나를 그리로 내 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야생의 기억, 그 환각의 맛을 오름으로써 만끽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붓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화가, 들어올리지 못한 역기를 놓지 못하는 역도선수, 패배한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하는 타자, 수직의 빙벽에서 죽음과 맞버티는 등반가… 단명하여 짜릿한 삶을 맛을, 그 영원할 수 없는 유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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