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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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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7일 04시 4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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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잠깐 샛길로 가보려고 합니다. 우리 둘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 애는 올 한 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을 맞이할 것 같습니다. 지난 금요일 그 애는 18 19개월 그 애 생애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날, 예고된 것보다 1주일 앞서 그토록 소원하던 대학의 합격자 발표가 있었고 그 애가 당당히 합격을 한 것입니다.

 

기르는 동안 그 애는 네 아이 중에 가장 저의 에너지를 앗아간 아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목청이 하늘을 찌르듯 날카롭더니 특유의 예민함으로 내내 저를 편안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아무 일도 아닌 것이 그 아이에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늘 내 용량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그 애 때문에 저는 더 많이 겸손해질 수 있었지만 한편 더 많이 지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애는 어릴 적부터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내려놓고 돌아올 때마다 울며 매달리는 그 애를 떼놓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때 우리는 외국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 속의 그 애는 외국 아이들 틈에서 늘 울고 있는 모습입니다.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너지는 억장을 달래고 있구요. 그런 그 애는 귀국하고서도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대안 학교를 찾았지만, 그 애는 대안학교에도 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홈스쿨링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지만 이미 그 때는 제가 풀 타임 잡을 가진 후였습니다. 그 애는 뒤통수에 붙어 떠나지 않는 편두통처럼 늘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그나마 평온했던 것은 중학교 시절 2년 뿐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그 애의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를 학교는 야자(야간자습)라는 이름으로 10까지 잡아두었습니다. 하루 종일 관심도 없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느라 힘든 그 애가 밤 늦게까지 우두커니 교실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저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와 실갱이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뾰족한 대안 없이 그 애가 학교를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몇 달이고 집요하게 조르는 그 애와 드디어 협상을 했습니다. 그 애는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혼자서 규율있게 공부하며 남은 시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열심히 찾아보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은 그 애와 나 모두에게 엄청난 시행착오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는 주도적으로 자기의 꿈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 애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혼자 집에 남은 아이는 원하는 대로 잠을 잤고, 영화와 드라마를 실컷 보았습니다. 연극도 보고, 만화책이나 연애 소설을 산처럼 쌓아놓고 읽었습니다. 틈틈이 엄마가 하는 공연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영어 공부를 했고, 검정고시를 보았습니다. 올해는 수능준비를 하면서 작년에 하다만 연기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애에겐 그것을 꼭 해야 하는 이유도, 목표도 불분명해 보였습니다. 일 때문에 그 애를 맘껏 도와주지 못하는 나는 그저 바라보며 그 애가 좀 더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이, 제 삶에 좀 더 주도적이지 못한 것이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 애가 어느 날부터 좋은 선생님을 만나 조금씩 연기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연기가 재미있어,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어.

그 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제 눈엔 눈물이 고였습니다. 얼마나 기다리던 말이었는지,, 이제 이 애가 제 길을 잘 가겠구나. 좀 특별한 외모에 기대어 헛된 꿈을 꾸는 건 아니구나.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그 애는 온 몸에 멍이 떠날 새가 없이 열심히 연습을 했습니다(사진 위). 노래연기, 몸연기, 자유연기, 제시대사아침에 나간 그 애는 12 다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요즘 웬만한 대학 연극영화과는 경쟁률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실기 시험에 응했지만 결과는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애는 욕심을 좀 내서 상향지원을 했습니다. 드디어 발표하던 날, 인터넷 발표 창을 앞에 두고 우리는 수험번호를 쳐 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 한 순간에 결정될 당락이 두려워 심호흡을 하고도, 오랜 시간을 망설였습니다.

 

‘**대학교 2009학년도 정시모집, 수험번호 06815030, **, 나군 일반전형, 연극영화과 연극연기, 뮤지컬 연기전공, 합격

 

우리 눈에는 합격이란 단어만 크게 확대돼서 보였습니다. 두 모녀는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엄마, 합격 앞에 자가 붙어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

그렇게 기다렸으면서도 그 애는 정작 자신의 합격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습니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행운이, , 나 정말 잘해야 할까 봐 엄마!

내 목을 안고 감격에 젖어있던 그 애가 느닷없이 나에게 큰 절을 했습니다. 그 순간, 지난 2년 동안 묵은 체증이 단숨에 날아가버렸습니다. 옆에서 놀란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집 강아지 동해는 그날 저녁, 고기 간식으로 포식을 하였습니다.

 

올 한 해 우리 아이가 어떤 성장을 경험하게 될지,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겠습니다.

 

우리 둘째가 합격하던 날의 풍경 더 보기: http://www.bhgoo.com/zbxe/158909

IP *.248.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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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9.01.27 11:00:52 *.47.237.87
은샘이었나요? 장하네요.
큰절을 하는 모습에 저까지 감격했네요.
흔치 않은 길을 걸었던만큼, 독하게 성실하게 잘 해낼거에요.
묵묵히 견디고 지켜봐준 엄마의 공이네요. 축하해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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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9.01.27 14:05:13 *.248.75.5
옹박 고마워.
제도권에 성정이 맞지 않아 애를 먹이던 그 아이가 역설적이게도 몇 년 쉬더니 제도권을 소망하더군.
제도권이든 아니든 이제 원하는 것을 이루어본 경험이 그애를 앞으로 나가도록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
좌절과 고통이 성장의 필수요건이란 걸 더 많이 배우게 되겠지.
그 애가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삶을 살아내길 다만 응원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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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9.01.27 14:09:39 *.237.105.215
아, 정말 축하드려요~~
가슴이 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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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
2009.01.27 17:24:34 *.109.189.23
콧날이 시큰해요.
사람 많은 커피숍에서 울지 않으려고 눈을 계속 껌벅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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썽이리
2009.01.27 22:15:37 *.5.127.214
자식을 키우는 기쁨이네요. 당신은 "새 생명을 낳아 키우는 것이 내안에 또 다른 세상을 안아주는 것이라고"했지요. 그 세상이 나와 다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그 세상이 스스로 피어날 수 있도록 때론 멀리서 바라봐야만 할 때도 있겠지요. 그 만큼 가슴아팠지만, 또 그 만큼 내 세상이 넓어진 것이겠지요. 그 아이를 통해 말입니다. 새해에 좋은 소식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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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2009.01.27 22:33:56 *.34.156.43
제도권 교육에 길들어 살아가는 아이들이 참 안타깝고 답답하단 생각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소신을 갖고 나름대로 삶을 잘 살아가는 따님과 엄마께 진심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그 용기 본받고 싶어요. 축하드려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시는 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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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주
2009.01.28 23:49:39 *.198.128.177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열린마음으로 딸을 사랑하는 엄마 모습이 참 예뻐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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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놈
2009.01.29 16:31:14 *.229.184.88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할 때, 소은은 어땠을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은샘이는 어땠을까?
사람들 대부분은 아주 큰 불확실성 때문에 결정을 미룹니다. 그 알지 못하는 미래 때문에 뻔한 길을 달려가는 물길 위에서 뛰어내리지 못하지요.
우리 대부분은 어느 지점에서는 뛰어 내림으로써 더 큰 강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소은과 은샘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믿도록 증명하고 있군요.

은샘양~! 축하합니다. 부디 바다에 이르도록 더 자유롭게 헤엄쳐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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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9.02.09 14:58:19 *.165.140.205
감 축 드 립 니 다!! 좋은 연기자로 거듭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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