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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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뭐?”
“됐다고, 네 냄새 나는 영혼 따위. 그냥 가져.”
“이 정리를 그저 날 주겠다고?”
원은 대답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침대 밑에서 바이올린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악기를 섬세하게 닦기 시작했다.
“그걸로 충분할거야. 처음 생각해내는 게 어렵지, 너 정도 수준이면 결국 이해해 낼거라고 믿어.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한테 면피는 되겠지.”
“정말 아무런 댓가 없이 주겠다고?”
“나중에 그 여자랑 어떻게 됐나만 알려줘. 궁금해.”
원은 장난스럽게 겔겔 웃었다. 김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서연... 감히 너 따위가 입에 올릴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김은 원의 말을 듣고 더욱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 그 근저에는 고서연이 있었다. 이 여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김은 자신이 애써 잊고 있던 욕망에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이 정리가 정말 참이라면, 너는 왜 네가 가지지 않는거야?”
“벌써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고 있네.”
“그 바이올린도!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바이올린을 끼고 들면서 왜 연주자가 되지는 않는거지? 너 정말 잘 켠다면서! 손혁도 기죽일 만큼!”
“내 맘이야.”
“도대체 왜 네 맘은 그 따위로 생겨먹은 건데?”
원은 김을 향해 돌아섰다. 김의 집착어린 질문. 원인은 알고 있다. 느닷없는 선물을 받은 김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원하고 있다. 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서 그래.”
“뭐가?”
“너 같이 쓸데없이 달려드는 녀석들이.”
“단지 그게 이유야?”
“난 자유롭고 싶어.”
“자유라면, 이 정리를 발표한다고 특별히 자유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저 조금, 유명해지는 것 뿐이라고. 이 바닥에서나...”
김은 원에게 이렇게 말하면서도 행여나 원이 “그래? 그럼 내가 발표할까?”라고 돌연 태도를 바꾸기라도 할까봐 불안감을 느꼈다. 원은 바이올린을 턱에 올렸다.
“무대에 서 본 적 있어?”
“아니...”
원은 바이올린의 브릿지를 김을 향해 총구 겨누듯이 돌렸다. 그리고 카덴자를 짧게 연주한 후 능숙하게 조율을 시작했다.
“평생 무대 위에 서 본 적 있어?”
“아니...”
“어떨 거 같아?”
“평생이라니?”
“말 그대로 평생, 화장실도 무대 위에서 가고 섹스도 무대 위에서 하고 잠도 무대 위에서 자는 거지.”
“그런 게 가능하냐...”
“그렇게 될거야. 네가 유명해지면 앞으로 네 오줌 소리를 들으러 사람들이 화장실로 따라 들어갈거라고.”
원은 이제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 입었다. 아마 음악대학의 연습실에서 도둑 연습을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늘 저녁 시간이면 몇 시간이고 연습을 하고 오곤 했다. 김의 눈에 프로 연주가가 아닌 그의 행동은 참으로 쓸데없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김은 원의 앞을 막아섰다.
“이제 알겠어. 네 말이 무슨 뜻인지.”
“그럼 리히터의 정리를 발표 하지 않겠다는 거냐?”
“아니,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겠다고.”
“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그 정리는 너에게 선물로 준댔잖아.”
“아냐, 그렇지 않아. 너 역시 내가 필요해.”
원은 한심하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 해보였다. 김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면서 넌 왜 이 대학 주변에서 서성이는 거지? 너도 네가 알고 있는 걸 세상에 공개하고 싶잖아! 다만 그 여파가 두려운 거지. 그렇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걸 원하는 부류고... 그래, 넌 너에게 몸을 빌려줄 대리인이 필요한 거라고.”
“대리인따윈 필요 없어.”
“그러면 유일권 교수나 백린기나, 아니면 이 땅 어딘가의 또 너 같은 천재가 이 정리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해도 좋단 말이냐? 그들은 네 존재 따위는 까맣게 모른 채 자신들이 이 세계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할거야.”
“...흠...”
“너도 그게 두려워서 대학가를 어슬렁거리는 것 아니냐고?”
“......”
원은 김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쩐지 입에 미소가 걸린다.
“그래, 기분이 엿같긴 하겠지.”
“그래! 그거야!”
김은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차라리, 나에게 맡겨! 나에게 모든 천재적 발상을 위임하는 거야. 그러면 너는 네 발상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을 바로 곁에서 확인할 수 있어. 동시에 너의 자유도 침해받지 않게 될거고! 덕분에 나는 천재 대접을 받게 될거야.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구.”
“너에겐 리히터의 정리로 충분하지 않아? 그걸로 평생을 우려먹고 살 수 있을텐데...”
“너는? 너의 천재성도 그게 다인가?”
“...넌 두려워 하고 있군.”
“뭘 말이야?”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의 천재성을 나눠줄까봐.”
원은 김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으로 밀었다. “누굴 상대로 거래를 하려드는 거야? 정신차려 자식아.”
“제발, 난 정말 믿을만한 놈이라구!”
“그건 모르겠고 가장 목마른 놈이긴 한 것 같다.”
원은 갈등하는 듯했다. 김은 원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닫고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야.”
“노예가 되겠다는 말 말이냐?”
“그래... 좀더 완곡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만... 너의 천재성을 나에게 파는 댓가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어.”
“넌 별 쓸모가 없다니까.”
“쓸모도 너의 천재성으로 구상해내면 훨씬 좋아질 거 아니겠어?”
원은 김이상의 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자식, 아주 바보는 아니군.’ 원은 무엇인가 흥미로운 생각을 해낸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갈등을 끝내고 제안을 건넸다.
“좋아. 계약을 하지. 이제부터 너는 나의 노예야. 내가 지시하는 바를 무조건 그대로 시행해야 해. 어길 경우, 계약은 그 순간부터 파기된다.”
“좋아.”
“정말로 무조건이야. 그 무조건에는 너의 생명도 포함된다.”
“...좋아.”
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은 날카로운 눈매로 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조수 역할을 해줘야 해... 나의 사업에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 또한 나의 행적에 대한 어떤 발설도 용납되지 않아.”
“뭘 하는데?”
“남의 영혼으로 할 수 있는 일.”
“... ...”
“왜, 방금 계약했잖아? 나의 머리를 너에게 주는 대신, 너는 나에게 네 영혼을 준거야.”
“영혼이라 함은...”
“왜 두려운가? 넌 네 신장도 팔았잖아.”
원은 전에 없이 차갑게 웃었다. “갑자기 깨달았어. 너의 효용에 대하여. 너는 백린기나 다른 수재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야. 너에겐 냉혈함이 있어. 목적을 위해 뱃속을 파내는 그 집요함!”
“인정해주니 감동적이네.”
“내가 배울 부분이지. 그래, 재미있을 거야.”
원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맸다. “연습하고 올테니, 너도 신변을 정리하도록 해. 내일부터는 다른 세상이 열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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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의 진도도 좀 다른 세상이 열려야 할텐데요.;;; 아무튼 진도는 꾸역꾸역 나가고 있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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