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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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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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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3일 00시 35분 등록

옷을 홀딱 벗고 욕실로 들어섰는데 따뜻한 물이 안나옵니다. 아침 기온이 영하 20도 가까운데. 보일러 조작장치를 보니 점검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주섬주섬 옷을 다시 입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일러실로 가봅니다. 이런! 난방유가 방금 똑 떨어진 모양입니다. 200리터 한 드럼을 가득 채운 게 한달도 안된 것 같은데, 이 숲에 오고 가장 추운 12월을 보낸 것이 맞는가 봅니다. 온도에 따라 자동으로 가동되도록 해둔 보일러가 예년에 비해 이번 겨울에는 거의 두 배 빠르게 기름을 소진한 꼴입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산방은 지금 눈에 완전히 갇힌 상태. 사륜구동인 내 차도 올라올 수 없는 상황이니 등유 배달 차는 더더욱 올라올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최근 열흘 동안 눈을 쓸고 또 쓰는 날을 보냈지만 이틀이 멀다하고 내리는 눈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낮 동안 쓸어서 길을 터넣고 잠들면 밤새 또 눈이 내리고, 어떤 날은 쓸고 돌아서면 다시 눈이 쏟아지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두 줄로 길을 뚫던 것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폭의 길만 터놓는 방향으로 어제부터 바꾸고 말았지요. 결국 저 눈이 다 녹기 전에는 난방유 배달 차를 오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들방에 뜨끈하게 장작 지피면 잠이야 춥지 않게 자겠지만, 침실보다 너른 면적을 차지하는 거실과 주방, 욕실에 난방을 하지 않고 겨울을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3주 동안 집을 떠나는 딸 녀석을 배웅하고, 신년맞이 영화도 한 편 보기로 했는데 당장 머리도 감지 못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또 폭설이 쏟아집니다. 우선 오늘은 그렇게 모처럼 가족과 하루를 묵으며 보내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두 말의 등유를 사서 돌아올 작정입니다. 지게에 기름을 져서 올리면 당장 급한 냉기는 지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 잊고 그렇게 기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내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건넵니다. 김치와 다른 반찬 두어 가지라며 무사하라 눈인사도 함께 보냅니다.


여우숲 입구에 차를 세우고 하루 사이에 또 쌓인 눈을 빗자루로 쓸어내며 길을 텄습니다. 겨울 해는 참 빠르게 떨어집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는 늘 마을로 내려갔던 바람을 숲이 다시 긁어 모읍니다. 겨우 장독대까지 밖에 길을 트지 못했는데, 벌써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중입니다. 서둘러 지게에 등유 한 통을 얹고 푹푹 눈을 밟으며 산방으로 올라왔습니다. 보일러실 기름 탱크에 져 올린 기름 한 말을 쏟아부었습니다. 유량 게이지에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도 보일러를 가동하자 부웅 소리를 내며 연소를 시작합니다. 지게를 세워놓고 우선 아궁이에 불을 지핍니다. 다시 지게를 지고 내려가 남은 기름 한 통을 지게에 얹었습니다. 아내가 챙겨준 반찬 보따리와 작은 책가방을 지게 끝에 꿰어 달았습니다. 돌아와 다시 기름을 붓고 아궁이에 장작 몇 개를 또 집어 넣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불 앞에 앉아 시린 발을 녹이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참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으니 다시 곧 기름이 떨어질 것이고 나는 기약없이 기름을 지게로 져 날라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눈을 치우는 일의 끝도 기약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종일 비질을 해대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픕니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내기도 어렵습니다. 기름을 말통에 담아 지게로 져올려야 하는 상황도 낭만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이런 상황들이 암담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내면은 ‘이만하면 족하지?’ 라고 묻습니다. 내가 또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합니다. 그래 이만하면 족하다. 족하다.   패 놓은 장작 있어 다행이고, 물 데울 편리한 보일러 있어 다행이고, 어둠 밝힐 전기가 아직 있으니 또 다행이다. 물 얼지 않아서 다행이고, 허리까지 눈 쌓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습니다. 숲에 사는 즐거움은 이만하면 족합니다. 우리 불행이 모자람에서 연유하지 않고, 또 불편에 그 뿌리를 두지 않았으므로, 이만하면 족합니다. 그대도 올 한 해 이만하면 족하다 싶은 나날 만드시기 빌며... 여우숲에서 드립니다.

IP *.20.2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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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7 18:37:53 *.111.7.136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이만하면 족하다...라고 저도 말해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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