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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0일 07시 37분 등록

그는 분홍셔츠를 즐겨 입습니다. 좀 웃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쉰 살이 다 된 그에게 분홍색이 참 잘 어울립니다. 그는 말이 좀 느립니다. 어느 지방 것인지 감이 잘 안 오는 특유의 악센트가 있습니다. 그와 이야기하면 마치 퓨전 사투리를 듣는 듯합니다. 그는 연한 분홍색처럼 은근히 웃깁니다.


모여서 놀러 갈 때가 있으면 장소는 종종 그가 제공합니다. 초여름 모래밭이 긴 서해안 증도로 우리를 데리고 간 사람도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모래밭에서 밤이 깊을 때까지 노래를 불렀습니다. 긴 장대에 신발을 묶어 꿰어 앞 뒤에서 어깨에 매고 발을 벗은 채 파도가 잔잔한 해변을 기차처럼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우리에게 노래와 웃음과 파도로 남았습니다. 신입 연구원들이 들어오는 4월 초에 우리는 언제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에서 환영회를 갖습니다. 내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속초 울산 바위 앞 그곳도 그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었습니다.


취미도 독특합니다. 두꺼운 한글 사전을 처음부터 뒤져가며 힘차고 아름다운 한국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말들이 주는 좋은 뜻을 새기며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 합니다.

한 번 따라해 보세요. 눈,코, 턱, 뺨, 귀, 입 코. 모두 한 자지요 ? 왜 우리 얼굴의 주요 부위를 가리키는 이름들이 모두 한 자 일까요 ? 또 있습니다. 뼈, 살, 혼, 넋, 힘 같이 몸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기본 구조와 에너지에 왜 힘이 펄펄 넘치는 한 자 짜리 멋진 단어가 이렇게 많을까요 ?

신기하게 그는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매일 좋은 말 한 자 씩을 찾아 좋은 뜻으로 가득 채우고, 365 페이지 만들어 마치 일력을 보듯 매일 그날의 그 단어를 찾아 음미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게 하는 '한 페이지의 명상집'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고 싶어 합니다. 아직 어느 출판사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도 주춤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그가 방대한 사전 찾기를 마치고 매 한페이지마다 아름답고 힘찬 우리 단어에 밴 미학과 스토리를 엮어 낼 것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오늘 그에게 짧은 편지를 씁니다.


"그렇다. 우리의 하루는 쉽게 건조해 지기 쉽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 매일 만나는 사람, 매일 다니는 길을 걸으며 하루가 저무는 것을 본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거울을 보듯, 얼굴에 가벼운 화장을 하듯 혹은 면도 후 스킨을 바르 듯, 허공에 떠 도는 무수한 단어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단어 하나를 잡아 하루를 여는 화두로 삼아 보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 인 듯 하구나. 언제 너의 그 주술 책이 나오는 것이냐 ?

나는 오늘 아침 붉디 붉은, 차마 마주 쳐다 볼 수 없는 '해'로 하루를 열어 볼까 한다. 너의 오늘은 어떤 좋은 단어로 열렸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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