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경(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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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잡지의 특집을 보았습니다. '아주 곤란했던 경우'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재미있는 경험담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지난 11월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날 저녁 9시 30분쯤 저는 홍대 '화로가인'이라는 숯불구이 집 계산대에 먹은 음식값을 계산하려고 서 있었습니다. 제 옆에는 그 날 아침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친구(남자입니다)가 서 있었구요. 한국에 처음 온 그 친구에게 '한국의 맛'을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숯불구이를 메뉴로 택했고 폼 나게 내가 내겠다고 선언을 했는데, 그런데 아, 제 카드가 한도 초과라고 뜨는 겁니다.
그럴 리가! 알고 보니 내가 들고 나온 카드는 평소에 안 쓰는 카드였고, 정작 내가 쓰던 카드는 전 날 치과 가는 작은 딸에게 주고 돌려받는 걸 잊었습니다. 잔고를 확인하고 나온 데빗 카드도 사용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잠시 동안 여러 용도로 현금이 다 빠져나간 모양입니다. 이런 걸 설상가상이라고 해야겠지요. 열어보니 지갑에도 현금이 음식값 만큼 남아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민망한 순간에 그 친구는 내 옆에 서서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네가 내라'고 하면 그만인데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순간 빠르게 판단해야 할 수 밖에요. 계산을 하시는 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있잖아요, 그 계산 용지를 저에게 주시고 계산이 된 것처럼 해주세요. 이 친구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죠. 제가 바로 나가서 입금해드릴게요.”
그 친구가 한국말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조금 어색한 상황이긴 해도 의심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계산대에 계시던 분은 식당 명함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나와 우리는 근처의 카페로 갔습니다. 그 친구가 와인을 마시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와인? 당근 계산할 돈이 없는 나는 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만 여기서 헤어져 집에 가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제트 래그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내일부터 당장 한국을 탐험할 기대로 두 눈이 반짝 반짝 빛났습니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라곤 나 밖에 없으니 그가 나에게서 관광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카페는 주문과 함께 계산을 해야하는 곳이었습니다. 내가 일어나 카운터로 가 메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주문하면서 계산해야 하니까, 먼저 무엇을 마실지 골라 봐.”
주문하면서 계산해야 한다는 정보를 일부러 흘리며 나는 그가 서양사람이니까 두 번이나 내 신세를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상식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기대는 맞아 떨어졌습니다.
“로이스, 와인은 내가 살게.”
“정말? 한국 사람은 손님을 한 번 책임지면 끝까지 책임지는데...”
아, 어쩌자고 나는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요? 그러다 그가 '그래? 그럼 오늘은 네게 기회를 줄게' 하고 말하면 어쩌려고 말입니까? 순간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의리가 있는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whole evening 나 때문에 바쁜 네가 시간을 내주었는데, 내가 와인은 살 게.”
‘아웅, 어쩜 이렇게 이쁠 수가! '
그 순간 정말로 끝까지 와인은 자기가 사겠다고 고집을 피는 그가 얼마나 이쁘던지요. 부담이 사라지니 와인은 더욱 맛있었습니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화로가인'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까 음식값 못 내고 나온 사람인데요, 절 믿고 제 번호도 안 가르쳐주었는데 외상을 해주어서 정말 감사해요. 제 전화번호 알려드릴게요. 아직 집에 못 들어가서 지금 당장은 힘들구요, 내일 꼭 입금해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전화를 끊고 보니 저는 그녀의 통장번호도 묻질 않았습니다. 그쪽에서도 가르쳐주는 걸 잊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전화를 걸어야 했습니다. 통장 번호를 물으니 그녀,
“회사 계좌가 아니네요.”
“아, 네. 제가 카운터를 보는 동안 생긴 사고는 제가 채워 넣어야 해서요. 계산을 맞추지 않고는 퇴근할 수 없거든요.”
“아, 저런! 말씀을 들으니 제가 너무 큰 실례를 했군요. 절 믿어주셔서 너무 너무 고마워요.”
나는 그녀가 사장인 줄 알았는데, 그냥 매니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그녀가 고마웠습니다. 내 번호도 모르면서 나를 믿고 그 곤경에서 구해주다니. 이 자리를 빌어 홍대 앞 화로가인의
카드 때문에 그런 곤경을 당한 것만 생각하면 상당히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분을 만나 정말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으니 그 날 나는 얼마나 운이 좋았던건지요. 그 이후 나는
3시간 후면 저는 유럽으로 출장을 갑니다. <영혼의소리로> 합창단과 함께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리는 안톤 브루크너 국제합창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의소리로>는 올해 창단 10주년을 맞은 홀트 아동 복지회 소속 합창단입니다. 이들은 미혼모에게서 태어나고, 장애 때문에 입양되지 못한 아이와 어른 25명으로 구성된 장애인 합창단입니다. 지난 4월 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은 일산의 홀트 요양원을 친히 찾아 이들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 주에는 오스트리아 현장에서 직접 그들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기사보기: http://www.kdaily.com/news/newsView.php?id=20090419800011&spage=1 )

누가 됐던 정치적으로 보이는 이런 사진 게재치 마시고, 덕분에 이번에도 메일 수신 정지 신청을 했습니다.
몇 달전 글에 실망하여 정지를 했는데, 전산 오류인지 그저께 부터 다시 왔거든요.
아무리 멋진 글도 마음과 통하지 않으면 감동이 없는 것 아닌지요.
이 나라에 살면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저는 그저 마음이 늘 텅빈 것만 같습니다.
수고들 하시고, 행복하게 사세요!


장문의 글을 썼다가 그냥 노트북에 저장만 했습니다. 그래도 불만이 많은 독자들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전직 때문에 현직이 밉고 그래서 장애인들은, 이 글의 말미에 붙은 장애인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인지... 이 글의 주연인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안정미 씨는 기억에도 남길 가치가 없었는지...
아무튼 이번 일로 소은 누님도 생각이 많으시겠군요. 글쓰는 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큰 보따리에 비가 내렸으니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푸른 바다 때문에 접었던 닉을 오랜만에 씁니다. 잘 다녀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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