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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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파격 할인’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재고를 처분하는 이벤트를 통해 팔리고 있는 주인공이 ‘인문학’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입맛이 씁쓸해졌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열된 책들을 빠르게 훑어 내리다가 『놀이와 인간』이라는 다소 딱딱한 제목의 책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로제 카이와’라는 저자의 이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구매버튼을 눌러버렸습니다.
읽고 있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에 대한 책을 잠시 뒤로 미루고 놀이에 대한 책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내적인 보상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그의 글은 쉽게 읽혀지진 않았지만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읽어나갔을 무렵 그의 이론이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모 루덴스』는 연구원 수련 과정에서 읽어야 했던 두꺼운 책 중에서도 가장 어려워서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던 공포의 대상이지만, 이렇게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나고 보니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정리해두었던 자료를 뒤적여가며 두 사람의 연구 결과를 천천히 음미했습니다.
놀이가 긍정적 중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미뤄두었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을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책갈피를 꽂아두었던 부분에서 몇 페이지쯤 읽어나가던 저는 ‘로제 카이와’의 이름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호이징하에게서 태어난 생각이 로제 카이와를 거치며 훌쩍 자랐고, 다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를 만나 말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세 권의 책들이 오묘하게 엮이고 연결되는 접점을 발견한 우연 속에서 저는 쾌감을 느꼈습니다.
정신의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 G. Jung •1875∼1961)은 이처럼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우연의 일치에 ‘공시성(共時性•Syndhronicity)’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저는 이 짜릿한 우연을 위해 ‘공시성’이라는 딱딱한 이름 대신 ‘작은 기적’이라는 애칭을 마련해두었습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우연의 일치 속에는 정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것일까요?
이러한 우연은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합니다. 제 경우엔 아내가 임신을 한 후로 유독 길거리에서 임산부와 자주 마주치게 되네요.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는 아장아장 걸어가는 계집아이만 눈에 들어오고요. 혹시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그 물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던가요? 이 모든 우연 속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나름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작은 기적’들을 하나로 꿰는 열쇠는 목표와 관심 그리고 용기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이면 세상은 우연과 기적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올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기를 내서 그 신호를 따라나서는 것이겠지요. 오감을 열어두세요. 그리고 세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거든 벼랑 끝에 힘들게 매달려 있던 손을 놓고 흘러가세요. 비록 처음의 계획과는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삶의 불확실성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놀이와 몰입 그리고 중독이라는 주제에 대해 우주가 마련해둔 우연을 따라 조금 더 멀리 가볼 생각입니다. 저를 기다리고 있을 ‘작은 기적’에 대한 기대로 다시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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