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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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것에 대하여
마당에 스승님 선물하신 배롱나무 꽃잔치 길게 열고 있습니다.
저들의 꽃잔치가 긴 까닭은 혹 저들의 외로운 겨울이 길었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썰물처럼 떠나고 나면 한동안 외로우시겠어요! 괜스레 미안해서 어쩌죠?”
산방을 찾아와 한참을 노닐던 그대가 어둠 속으로 떠나면서 나를 염려하여 두고 가신 말입니다. 그대의 배려심이 얼마나 따뜻한지요. 하지만 염려하지 마세요. 나는 홀로 있는 시간 때문에 외롭지는 않습니다.
외로움은 불통 속에서 오는 것, 많은 이들은 뜨거운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종종 얼마나 차가운 고독을 껴안고 사는지요! 긴 시간 애쓴 탓일까요? 나는 이제 나 자신을 만나 소통하는 일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점점 더 허구적이고 자본적인 가치만을 맹신하는 방향으로 내닫는 세상과 대면하기가 버거울 뿐입니다. 세상의 언어로부터 점점 멀어져 내 귀에 들리지 않는 말들이 많아지는 날도 내게는 외로운 날, 여전히 숲 속 다른 생명들의 언어를 알아차리지 못해 자연 앞에 무도해지는 날들도 외로운 날입니다.
물론 그대가 염려했던 나의 외로움은 텅 빈 공간 혼자 있어 맞닥뜨려야 하는 고독감이었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그러한 종류의 외로움이 부족한 것 아닐지요? 어쩌면 그대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가장 충일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시간이기 쉬우니까요.
세상에는 요즘 외로움 없이 쓰여진 노래가 적지 않습니다. 고독이 주는 통증을 거치지 않은 사유 또한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고 허구적이고 수탈적인 시류를 쫓아 그것을 더욱 자극하는 미각에 치중하는 이야기도 넘쳐나고 있습니다. 발가벗은 채 스스로를 대면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시류와 기교를 쫓아 나오는 언어와 노래와 전략과 사랑을 나는 믿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쓰러지고서야 봄이 온다”는 시인의 말처럼, 우리의 삶 또한 진정 외롭고 나서야 가득 차오르는 것이 아닐지요? 실로 그대가 외로움이라 부르는 그것 앞에 나는 기꺼이 쓰러집니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야 스러지지 않는 나로 자란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 주에 한 번 정도 그대의 삶에도 외로움으로 쓰러지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벌들의 언어에 공감하지 못해 외로운 날, 백오산방에서 김용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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