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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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나무는 가을에 그 단풍이 붉고 붉어서 얻은 이름이다. 단풍나무가 없는 숲에서도 고운 가을 단풍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서울 가본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광화문 앞이 확 바뀌었다던데 지금 서울의 풍경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빌딩 숲이야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럴 테지만, 이 즈음 고궁의 바람과 빛깔은 기억이 날 듯도 합니다. 경복궁과 경희궁도 좋지만, 아마도 지금, 덕수궁 가을은 지나치기 아까운 빛깔일 것입니다. 많은 궁궐 중에서도 가을의 아름다운 바람과 빛깔이 주는 황홀경은 뭐니뭐니해도 비원이 최고이지 싶습니다. 숲에 살면서도 더러 그곳 연못에 비추는 단풍 빛깔에 문을 닫을 때까지 넋을 잃고 취했던 날들이 떠오르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나 살고 있는 숲도 단풍이 좋습니다. 호수처럼 아담한 괴산댐 위, 산막이라는 마을에서 옛날 장에 가던 길을 복원해 놓은 ‘산막이 옛길’에 요즘 많은 이들이 찾아 듭니다. 모두 가을을 기억하려는 이들입니다. 그들 중 가끔 나의 숲 안내를 희망하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 앞에 서는 날도 있습니다. 요즘 나는 그들에게 단풍 이야기 한 자락을 해주고는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설악산’, ‘내장산’이 약방의 감초처럼 그들 입에 오릅니다. 이어서 그곳의 단풍이 왜 가장 아름다우냐 묻습니다. 이 질문에 감초는 ‘일교차’가 됩니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 왜 그곳의 단풍이 가장 아름다울까요? 물론 일교차가 크면 분명 단풍은 더 아름답습니다. 나무들의 생리적 반응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왜 특정한 곳의 단풍이 더 아름다워 유명해 졌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단풍이 드는 나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산세가 험한 산일수록 단풍은 깊고 아름답습니다. 궁궐이나 내장산 가로변처럼 일부러 심은 단풍나무를 제외하고 산 자체 만으로 단풍을 보면 산세의 험난함에 단풍 빛의 곱고 화려함이 비례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 그 이유는 사람의 간섭이 적은 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세가 험하면 사람의 간섭도 어렵습니다. 사람의 간섭이 적은 산은 숲 고유의 질서에 따라 나무와 풀들의 시대가 변해갑니다. 초기의 숲은 제법 긴 시간, 소나무처럼 빛을 좋아하는 나무들이 숲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어느 정도 음지를 견디는 능력을 키워온 낙엽활엽수에게 그 자리를 내주며 세력을 잃어갑니다. 산벚나무, 생강나무, 붉나무, 쪽동백, 화살나무, 회잎나무… 이들은 모두 가을이면 단풍으로 고운 나무들입니다. 이렇게 노랗고 붉게 제 잎을 물들여 지우는 나무들이 많이 살수록 그 숲의 가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가 사는 마을에 ‘산막이 옛길’을 복원한 입구에는 소나무만 살고 있습니다. 옛길을 복원하면서 입구를 ‘소나무 숲’ 테마로 정리한 탓입니다. 그곳은 소나무를 제외한 나무들을 모두 베고 소나무만을 남겨둔 곳입니다. 잘려나간 나무들은 소나무에 비추어 잡목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잡목(?)들의 대부분이 바로 가을 단풍으로 고운 나무들인 것입니다. 이 땅, 사람의 손길이 닿는 숲에 사는 잡목(?)들은 불행한 현대사를 겪어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을 끝내자 한국전쟁의 포화에 불타야 했고, 전후 긴 시간 수많은 아궁이의 땔감으로 잘려나갔습니다. 전원주택지나 개발지에서도 소나무는 대접을 받지만 그들은 천덕꾸러기입니다.
가을은 우리가 단풍 드는 나무에게 한 일을 기억합니다. 단풍이 거의 없는 숲에 서면 나는 잡목의 원성을 듣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문화의 단조로움이 숲에 조차 이르는 이 사회의 여유 없음을 한탄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사계절 비원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숲을 그리게 됩니다. 방방곡곡 다양성의 씨앗이 터져 나오는 그 사회를 그리게 됩니다. 그대는 이 가을 무엇을 그리워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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