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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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백일 넘게 산방 마당에 붉은 꽃 아름답게 피웠던 배롱나무의 줄기. 그의 줄기는 제 겉 살이 터져나가는 과정을 거쳐 한결 굵어질 수 있었다. 제 살을 깎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성장이 어디 있던가!
입동이 지났습니다. 숲 속의 두 번째 겨울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는 그대 안부처럼 나는 이제 이 곳 산방에서 새로운 겨울을 맞습니다. 산방 입주와 함께 새로 생긴 모든 존재들 또한 두 번째 겨울을 맞습니다. 산과 바다는 자연스레 세속하여 여덟 마리의 강아지를 낳았습니다. 마당에 심은 모든 나무들도 새로 처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저답게 한 해를 보냈습니다. 매화는 하얗고 예쁜 꽃을 겨우 몇 송이 피우더니 세 알의 매실만을 남겨주었습니다. 대추나무는 꽃도 피우기 전에 뿌리 부분에 이상이 찾아와 잎을 모두 지운 채로 서있습니다. 어린 소나무 중 몇 그루는 한 뼘의 키를 키우며 적응했지만, 몇 그루는 선 채로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겨울을 맞기까지 한 해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겨우내 숲에게 길을 물었고, 봄에는 그 대답을 모은 첫 책을 냈습니다. 그를 통해 세상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숲과 삶을 주제로 더욱 신나게 강의를 할 기회를 얻었고, 마을 주민을 설득해 함께 정기적으로 공부하는 모임도 이끌게 되었습니다. 농사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버려둠 농법을 통해 내가 농사짓는 땅이 얼마나 피로한 상태인지,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땅의 힘을 되찾아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토종 꿀벌을 분양 받아 아주 조금 새 식구도 늘렸고 토종 꿀벌 농사가 내게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내 삶이 얼마나 충만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힘겨웠던 일도 적지 않습니다. 책은 기대보다 팔리지 않아 살림은 늘 빈한했고 글을 쓰는 일의 보람과 현실의 갭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도 보내야 했습니다. 마을 주민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아 긴 시간을 돌아서 닿아야 했습니다. 내버려둠 농법도 결코 만만하지 않아 적자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토종 꿀벌을 치는 일도 서툴러서 다른 경험 있는 분들 만큼 제대로 세력을 키우는데 실패했고, 그리 많은 수확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이렇듯 숲 속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기까지 나는 적잖은 힘겨움을 겪었고 또한 제법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요컨대 새롭게 시작한 삶이 작은 성장으로 이어지기 위해 지난 계절 동안 꾸준히 모색하고 이것저것 힘겨움을 거쳐야 했던 한 해였습니다. 성장하고 싶은 한 해였고 성장하며 아팠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을 향해 걷고 있는 과정임을 한시도 잊지 않은 한 해였습니다.
나는 산방 마당에 스승님께서 선물해 주신 배롱나무로부터 성장의 법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함을 배우며 새롭게 다가오는 두 번째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당의 배롱나무는 칠월에 꽃을 피워 그야말로 여름 내내 마당을 환하게 밝혔습니다. 드나드는 모든 이의 눈을 사로잡았고, 산방을 한결 정취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배롱나무는 장맛비 거세던 한때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바람 거세게 몰아치던 때, 꽃을 가득 피웠던 가녀린 두 개의 가지가 긴 시간 꺾일 듯 땅을 향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화원의 보호된 환경을 떠나 대자연에 새 자리를 잡은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를 잃지 않았고 뿌리가 뽑혀 넘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비바람을 대하는 그의 유연함이 그를 살렸고, 지금 그의 가지에는 익은 열매가 달려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성장했습니다. 내년에는 아마 더 잘 비바람에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줄기가 더욱 굵어졌기 때문입니다. 굵어진 그의 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꺼풀 허물을 벗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직경을 키우느라 오래된 제 살 한 겹을 버린 모습입니다. 그의 줄기는 제 겉 살이 터져나가는 과정을 거쳐 한 결 굵어질 수 있었습니다. 제 살을 깎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성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배롱나무의 그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두 번째 겨울을 맞으려 합니다. 입동이 지난 지금 그대는 어떻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지요?

용규씨,
이 글은 어쩜 그렇게 11월을 잘 그려내고 있는지...
가슴 한편이 서늘해지다가도.. ...어쩔 수 없이 그 처연한 아름다움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군요.
지난해 가을에 백오산방을 떠나 화양구곡의 채운사를 들려서 서울로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요,
그 고장의 청정한 단풍이 정말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이렇게 가을이 깊어지면 그 동네를 다시 찾아가
최고의 눈맛을 누리고, 그 고운 색깔의 약 술도 한잔 홀짝 거려보고
또, 그 버섯전골의 향기도, 따뜻한 김이 서리던 냄비도...즐기리라고 다짐했었는데....
그만 가을의 끝에 서서, 회한에 젖고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이죠? 희망하는 것이? ㅎㅎ
그냥 술한잔과 냄비 하나면..... 이 문턱을 조금 쉽게 넘어갈 수 있을텐데...
나는 혼자서 그런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시간 나면 훌쩍 함 올라오세요.
부암동 백석동천에서 들었던 근사한 숲이야기가 그립습니다.
용규씨 팬들이 우리집 가까이 많이 살고 있잖아요?
* 참 내일 청주에서 신영복 선생님 강연이 있습니다.
더 숲 트리오도 함께 하더군요. 민주 넷에 접속해 보셔요.
배롱나무 아름다운 가지 속에 담아놓은 꽃송이들이 겨울을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짧은 수명에 비해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나무들의 지혜인가 보군요...
흰까마귀는 안 보이고
까치들이 까치밥을 먹고 있더군요. 가을인가 봅니다.


그대 글의 제목을 보고 글을 읽기 시작하다가 내 생각에 젖어 그만 주루륵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무슨 대목을 읽어내려가다가 내 생각을 하였는지 찾으며 다시 읽다가 또 어느새 내 생각에 빠져서 놓쳐버렸습니다.
'제 살을 깎으며 이루어야 하는 성장'에 깊이 공감을 하는 모양입니다... 만... 아직도... 많이... 멀게 느껴지는 게지요.
헤매며 참으며 좌충우돌하며 호소했다 울었다가 웃었다 다시 눈을 부릅뜨며 침몰하고 또 깨어나고...
그러면서 꿈이든 인간관계든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더디고 어렵게 내 방식으로 또 다른 이들과 다른 모습들에서 차이를 느끼고 배우며 지나쳐갑니다.
'소통'이라는 짧은 말과 '상생의 어울림'이라는 참 좋은 단어를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잘 풀어낼 수 있을지 가슴 깊이 새기며 좀 더 슬기롭고 지혜로운 한 해로 꼭 마감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제 살을 좀 더 깎아야 하나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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