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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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눈에 길이 막힌 시간이 길어지자 이웃의 염려도 컸습니다. 마을에 쓰고 남은 제설용 염화칼슘과 모래 주머니를 나눠주시며 길을 열어보라고 배려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지게지고 오르내리는데 위험할 만큼 많이 미끄러운 경사로에는 발자국 따라 모래를 다 뿌렸습니다. 염화칼슘도 한 포 뜯어서 몇 움큼 뿌려보았습니다. 신기합니다. 결정체가 떨어진 자리마다 소리 없이 눈이 녹으며 함몰됩니다. 그냥 듬뿍 흩뿌리기만 하면 이내 흙 바닥이 드러날 것 같습니다. 참 편리합니다. 확 쏟아 붓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 언덕길을 따라 피고지고 빛나며 내 영혼에 박혔던 그 무수한 아름다움이 아른거렸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고마리∙꽃마리∙병꽃나무∙물봉선 꽃들이 길 따라 줄지어 피는 언덕입니다. 날개 짓하며 실컷 노닐던 새들이 목욕하고 떠나는 옹달샘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늦여름 밤이면 그 귀한 반딧불이 푸른 빛을 토해 짝을 찾는 밀회의 장소이기도 한 곳입니다. 봄이 오면 수런대기 시작할 그들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눈을 녹인 염화칼슘의 소금기를 그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땅의 경사와 실개천을 타고 흐를 이 염류의 과도한 집적이 그들의 삶을 위협할 테니까요.
인류는 근대 이후 오늘까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더 편리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고유 권리라는 신념을 형성하고 강화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대단한 물질적 진보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진보는 또한 배금과 편리의 기치아래 우리를 포함한 생명권 전체의 터전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곳곳이 깨어진 생태계의 아우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자연적 재앙으로부터 분명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아직도 더 많은 재앙의 증거를 만나야 알게 된다면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은 때일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는 중세를 종교의 시대로 읽고,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 이성의 시대는 또한 타자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不感)의 시대였습니다. 불감의 시대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목하(目下) 아이티의 지진대재앙 앞에 세계의 공감과 도움이 답지하고 있습니다. 그 도움의 손길의 본질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고난이요 재앙임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공감이 함께 할 때라야 세상의 희망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도 이 불안한 시대를 구원할 새로운 대안의 하나로 ‘공감’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는 “ 공감한다는 것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경험을 깊이 나누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의 이 정의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인간만을 겨냥한 이 정의는 생태계로 확장될 때 더 큰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 생명권 전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야 말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공감이 될 것입니다.
안개에 휩싸인 겨울 숲에 지금 비가 옵니다. 그렇게 긴 시간 춥더니, 정작 크게 춥다는 ‘대한’ 절기에는 영상 10℃를 넘기며 제법 많은 비가 내립니다. 이 비로 산방으로 닿는 길 위의 눈 대부분이 녹고 있습니다. 나를 불감의 유혹에 빠트렸던 눈도 함께 녹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 자연이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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