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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8일 06시 04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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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지하철에서 뿌꼬에 대한 약속을 떠올렸다. 가방 속에 빨강 공책과 펜을 꺼내 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아서인지 한 줄 쓰기도 힘들었다. 다른 생각만 나고 뿌꼬에 대해 집중할 수 없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우측에 앉은 사람은 잠에 취해서 어깨 위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왼쪽에 앉은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카톡에 열심이었다. 음악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이어폰의 진동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기차가 환승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일어 섰다. 출입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자, 졸고 있던 남자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죠?”

잠실역이예요

, 지나왔어, 또 지각이야

 

그는 갑자기 일어나서는 닫히고 있는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거의 몸을 던져서 간신히 통과했지만, 출발하는 창문 너머로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가 점점 멀어져 갔다.

 

누군가 옆자리에 앉았다. 뛰어가는 사람을 보느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여자였다. 그녀는 장갑과 목도리를 벗어서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작은 체구여서인지 조금 전 눌려진 어깨는 제자리를 찾았고, 글씨도 또박또박 써졌다. 생각이 조금씩 집중되었다. 주변 사람은 보이지 않고 눈 앞에 공책과 볼펜의 움직임만 보였다. 한참을 써 내려가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옆자리 앉은 그녀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천천히 가슴과 공책의 간격을 좁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몸을 뒤로 젖혀도 똑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다시 또 나의 공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웠다.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 같았다. 나는 공책을 덮고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작가세요?”

 아니요.”

 그럼 왜 자꾸 저의 글을 보시는 거죠?

 

침묵이 흘렀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온 사람처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 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이 행복해 보였어요

 누군가와 약속을 했어요. 이야기를 꼭 완성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의 글에도 행복이 묻어 있어요.”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시잖아요?”

 글자들의 모양만 보아도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어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생각나는 대로 쓴 건데 어떻게……”

 아무리 급하게 써도 글자는 그 사람의 마음과 함께 움직이거든요.”

 

 그녀는 공책을 보여달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녀에게 공책을 건네주었다. 맨 앞장 제목부터 읽어내려 갔다. 알아 볼 수 없는 글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간혹 웃음짓기도 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어색한 순간이었지만, 누군가 나의 글을 읽어준다는 마음만큼은 즐거웠다.

 

 뿌꼬가 주인공인가요?”

 

 그녀는 공책을 덮고는 나에게 말했다.

 

 , 맞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 뿌꼬와 약속을 했어요. 이야기를 완성하겠다고 말이죠.”

 

   그녀가 갑자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내 뺨에 닿았다. 그녀의 향기에 잠시 정신을 잃은 순간, 지하철이 멈췄고 출입문이 열리자 그녀는 내렸다. 문이 닫힐 때쯤 뒤돌아 서서 나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네모 모양을 그렸다. 처음엔 어떤 의미인지 몰랐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공책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네모 모양은 나의 공책이었다. 신기하게도 펼치자마자 낯선 글씨가 보였다. ‘잠실역 4-3’ 이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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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10:01:16 *.154.223.199

오, 신기한 만남이네요. 신비로운 여인.

그런데 정말로 글씨만 봐도 알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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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1 05:12:03 *.194.37.13

누님이 제 모델이예요. 이제 글을 쓰면서 조금 뻔뻔해질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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