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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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命)은 울릉도 사람들이 부르는 그의 이름입니다. 그의 정식 이름은 ‘산마늘’. 울릉도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풀이라는 뜻으로 그를 멩(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명(命)은 오대산, 설악산, 지리산 등에 자생하지만, 울릉도에 가장 많이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해 살이 풀로 대략 마흔 살을 넘겨 삶을 잇는다고 합니다. 울릉도는 산마늘의 채취와 반출을 불허하고 있습니다. 5년 전 광릉에 있는 국립수목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지만, 워낙 귀해서 그를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제 드디어 경상도 땅에 있는 한 농가에서 그를 다시 만났고 몇 포기 얻을 수 있었습니다.
농부는 아직 얼어 있는 땅을 호미로 파서 내게 명(命)을 건네주었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그의 잎이 막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인경이라 부르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줄기뿌리가 겨우내 언 땅을 견딘 결과가 지금 막 잎으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줄기뿌리가 거즈보다 얇은 직물로 감싸져 있었습니다.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밭에서 키우려면 이렇게 천으로 뿌리를 감싸주어야 하나 보죠?” 농부가 빙그레 웃으며 “아닙니다. 그것은 멩(命)이가 스스로 만든 천입니다.” 합니다.
그의 뿌리에 입혀진 옷은 분명 하나의 천과 같았습니다. 삼베옷처럼 정교하게 짜인 옷을 스스로 만들어 뿌리를 보호하다니! 나는 “정말? 이게 멩(命)이가 스스로 만든 천이라고!” 깜짝 놀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대에게도 얼른 그 뿌리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연약해 보이는 생명이 자기를 지키고 성장하고 지속하기 위해 키워온 놀라운 모습을, 그가 빚어내는 그냥 마늘보다 훨씬 깊고 신선한 향기와 윤기 있는 새싹을! 이 모두를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나는 몇 개의 화분과 마당 음지 쪽에 그를 심었습니다. 키가 작은 그는 어느 다른 풀보다 먼저 잎을 낼 것입니다. 4월에서 5월 사이 향기 가득 담은 잎을 내고 여름으로 들어가는 시기에 꽃을 피우겠지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열매를 맺고 서둘러 잎을 지울 것입니다. 다시 겨울을 견딜 조밀한 천을 만들어 긴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네다섯 살이니까 죽는 날 까지 사철, 나는 그와 함께 살 것입니다. 여려 보이는 풀일지라도 그가 어떻게 시간을 따라 자신을 바꿔내며 살아가는지 바라보고 배우고, 나도 그렇게 살겠지요. 다른 풀에 치일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은 풀이라는 제 핸디캡은 시간을 앞당겨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것으로 극복한 풀. 그러기 위해 언 땅이 채 녹기 전인 이른 봄에 싹을 틔워야 하고, 다시 그러기 위해 겨우내 언 땅을 견딜 집과도 같은 옷을 스스로 만들어 뿌리를 감쌀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풀. 저 피워내는 잎 한 쪽 정도는 기꺼이 사람이라는 생명에게 내어주어 그들의 목숨을 지켜줄 줄 아는 넉넉함을 갖춘 풀. 그와 함께 사철 살다 보면 나도 그렇게 살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오늘 이렇게 설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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