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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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열세 살이 되자 더 늦기 전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말 없이 그러마 했지요. 이미 인터넷에서 갖고 싶은 자전거를 골라놓았더군요. 액세서리 몇 개를 포함해 주문을 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도착했습니다. 월요일 오후, 녀석은 너른 운동장에서 제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녀석은 생각보다 빠르게 자전거 타는 법을 익혔습니다. 아비가 가만히 조금씩 손을 놓는 것도 모르고 홀로 그 불안한 구조의 물체를 굴러가게 하더니, 이윽고 한 시간 만에 100여 미터를 혼자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더 큰 공부가 어디 있을까. 녀석이 참 대견했습니다.
문득 함께 사는 개 ‘산’과 ‘바다’가 떠올랐습니다. 나의 그것처럼 그의 첫경험이 서툴긴 했으나, 수컷 ‘산’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바다’를 취하는 법을 알아냈습니다. 암컷 바다 역시 배우지 않고도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고 고루 젖을 물리고 청결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해 자식들을 길러냈습니다. 이후 녀석들에게서 앳된 얼굴은 사라졌습니다. 문득 어른이 된 얼굴이었습니다. 행동 역시 그랬습니다. 애교와 아양으로 내게 관심을 끄는 대신 깊은 눈빛으로 나를 주시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먼 길 다녀오면 곧장 수백 미터를 뛰어내려와 반겨주던 습관도 차츰 주변 산으로 흩어져 뛰놀다가 살짝살짝 모습을 보이며 나를 반기는 습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주인과의 관계를 잊지 않았으나 차츰 자신들의 피 속에 늑대의 야성이 흐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바다’가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고라니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장작을 패다가 녀석이 고라니를 사냥하는 장면 전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집 뒤의 숲에서 바다에게 발각된 고라니는 숲 언저리를 따라 빛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다 역시 질풍노도와 같이 추격했습니다. 800미터쯤 내달리던 고라니가 핏빛으로 크게 울더니 일몰의 잔상처럼 소리를 흩어 놓다가 마침내 잠잠해졌습니다. 방문객과 함께 현장에 가보았을 때 바다와 뒤늦게 도착한 ‘산’의 앞가슴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리품을 시식하는 현장이었습니다.
이후 녀석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거실의 문 앞을 지키는 시간이 짧아진 것이 그 하나입니다. 대신 숲으로 뛰어다니는 시간이 길어졌지요. 이 변화의 근본 원인은 아마 고라니의 뜨거운 피 맛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바다’ 위에 군림하던 ‘산’이 더 이상 그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마 크고 작은 사냥에서 늘 ‘바다’가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산’이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딸 녀석과 자전거를 타러 가던 평일 오후 거리와 운동장에서 또래의 아이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딸 녀석 말이 모두 학원에 가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반면 딸 녀석은 늘 평일 오후를 나의 유년시절처럼 보냅니다. 단 하나의 학원도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 학원 보낼 여유가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연성의 힘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급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 꼴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다’와 ‘산’은 사랑과 사냥을 따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딸 녀석 역시 교본을 익혀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내 생각은 위험한 것일까요? 그래도 이는 내가 차마 버릴 수 없는 위험한 생각인 걸 어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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