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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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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08시 53분 등록
 

나에게 신화란 무엇인가?


 지리는 내가 좋아하고픈 과목이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속 제제가 청년이 된 이야기라는 속편은 방랑자와 광란자라는 두 가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어린 제제를 기억하는 나는 절대로 제제는 광란자일 수 없다며 ‘방랑자’를 선택했고……. 미리 받아 둔 지리책에 「지리는 나그네 방랑자의 과목이다」라는 글귀를 적어두고선 고등학생이 되기를 기다렸다.

 지리는 지리했다. 지리는 방랑자가 갈 길을 보여주지 않았고 나그네가 머물 길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어느 지역에서 텅스텐이, 고령토가, 또는 석회석이 많이 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칠판에 그려진 지도는 어딘가로 이어진 무언가를 향해 가는 선이 아니라 그냥 콕콕 박힌 점들만을 품고 있었다. 길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텅스텐이며 고령토가 필요없었기에 찾지 않았다. 석유라도 찾아볼까나 했지만, 거긴 사막이었기에 나는 늘 어딘가에 콕 처박힌 한 점으로 머물렀다. 나그네, 방랑자의 과목 지리는 오래도록 그저 길없는 지도였다. 나는 길없는 지도를 보면서 새로운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텅스텐 대신 다른 것을 캐내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 많은 나라 중에서 왜 대한민국에 태어났을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나는 여기서 무얼 하게 될까, 나는 언제 죽을까, 나는 왜 죽을까, 뭘 하다가 죽을까…. 정확히 무언가를 캐내었다고 할 순 없다. 다만 계속 캐기 위해 들어가졌을 뿐이다. 나는 아리아드네처럼 실을 되감아 미로를 빠져나오는 방법을 몰랐는지 늘 되돌아오지 못했다. 그 시간 당면한 과제는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이었을 텐데, 신화 속 전설 속 주인공들 곁을 따라다니는데 더 빠져 있었다.

 신화 속 영웅들은 길을 떠나 모험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여 진정한 영웅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수업을 소홀히 하고 머릿속으로 떠난 길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내가 떠난 그 길에서 분명 많은 것을 마주치고 무수한 경험들을 했음에도 깨어보면 여전히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아무런 외적인 변화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진정한 모험, 여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carpe diem을 잊었기 때문일까. 그까짓 영웅따위야 안 되면 그만이지 싶다가도 나 역시 마음속에 타오르는 욕망이 있는지라, 눈을 떠 나를 직시하게 되면 지극히 평범한 나를 패주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현실에서 뭔가를 드러내기 위해 허겁지겁, 허둥지둥이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나는 변화의 면을 보이고 있었다고 봐야 할까. 조금이라도 성장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라는 기본적인 설명을 넘어서 여러 상징으로 전달되고 있다. 물론, ‘영웅신화’, ‘성공신화’, ‘창조신화’와 같은 문구를 달고서 오기도 한다. 실패신화는 없다. 실패는 신화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인 것일까. 하지만 영웅은 실패와 고난을 분명 경험한다. 우리는 성공적인 이야기에 고무되고 열광할지라도 성공하기까지의 실패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실패가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패로 점철된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규정하는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무엇일까. ‘성공’에 대한 인식은 사회에서 강조하는 것과 내가 인식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실패 역시 그렇다. 누구에겐가는 실패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도전이고 또한 강렬한 성장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공이든 실패이든, 비극이든 희극이든, 모험을 자극하는 강렬한 신화이야기는 먼 나라, 낯선 이의 얘기가 아니라 내 삶 속의 이야기로 대치된다. 그리하여 이 얘기들에 미친듯이 빠져들어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도달하고픈 신화를 마주하고자 말이다. 나는 이쯤에서 비로소 청년 제제의 이야기가 왜 방랑자와 광란자라는 두가지 제목으로 번역되었는지 알 듯하다.

 긴 호흡으로 보면,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길을 떠나고 있으니 말이다. 10대의 내 머릿속 여행은, 아니 나를 들여다본 여행을 그 시기가 가져다 준 흔들림과 방황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온 매 시기마다 흔들렸고 방황했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긴 걸음을 걸어갈 것이다. 이번에는 아리아드네의 실뭉치를 잊지 않고 챙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실이 끊어져도 모자라도 상관없다. 내가 가는 길은 죽는 날까지 진행될 여정이다. 그 길에서 어느 한순간은 미친 열정으로 폭발할지 모른다. 그렇게 강렬한 열정이 소진되고 또다시 터벅터벅 걸을지도, 잠시 멈출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 점하나 이렇게 달랑찍어 내 생을 마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나그네가 되어 방랑할 것이다. 나는 그 가는 길마다마다에 내 이야기를 심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 것이다. 나는 신화가 될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현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실패라는 길로만 향해 갈지도 모르고,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라는 캠벨의 말을 빌려 나는 지금 영웅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게 신화는 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끊임없이 피어오를 이야기다. 얘깃거리이다.

IP *.177.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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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08:59:25 *.58.97.136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고령토는 고령에서 많이 나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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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12:31:35 *.124.98.251

지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이었죠. 근데 텅스텐, 고령토 이런 건 기억 속에 하나도 ( ㅋㅋ)  들어있지 않고 유럽 지역의 '제비족'에 대한 이야기만 남아 있어요. 남부에서 올리브인지 포도인지 농장에서 일하다 그 시기 지나면 북부로 가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아닌데, 그 때는 왜 이 사람들이 그리 자유롭게 들렸는지 나는 유럽의 제비족이 되길 동경했었죠....

 

방랑자, 유목민...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인데  신화의 인물들은  방랑자조?  실제로든 상징으로든.   그대의 헤매임을 축하하며 .. 목도리 짠다고 쟁여놓은 실뭉치, 내주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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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20:21:03 *.177.81.59

1학년땐 한국지리부터 배웠어요. 세계지리는 2학년~

아마 첫 단원이 지형과 자원? 뭐 그런 거였던 둣해요.

우리 지리샘들은 제비족 이야기 안해주셨는지 기억에 없네요...

"유럽의 제비족" ㅋㅋ 갑자기 제비족의 어감이 딴 쪽으로 생각되어서^^:::

응원 감사하고, 얼른 자유의 방랑을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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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16:50:51 *.62.164.78
꽉 짜인 글이네요. 프로의 향기가 납니다. 옆에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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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20:14:21 *.94.41.89

실 꼭 챙기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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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15:29:09 *.91.142.58

좋은 글 잘 읽고 가요 ~^^*

우리 남은 레이스도 힘내서 홧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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