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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4일 11시 47분 등록

Book Column 1

나에게 신화란 무엇인가

2013. 2.3

 

처음 신화는 내게 역할 놀이의 스크립트였다. 초딩 시절 처음 만난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는 열두 신의 이름과 특징만 달달 외워 이 중 누가 나의 수호신이 되어야 하는 지를 상상하며 순정만화 삘의 낙서로 연습장을 수없이 채웠던 것 같다. 나 혼자 지혜롭고 용감한 아테네가 되었다가, 신비롭고 역시 용감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도 되었다가, 내친 김에 맘에 드는 남신들과 나의 수호 여신들을 내키는 대로 중신까지 서가며 온갖 유치찬란한 이야기들을 꾸며 내곤 했다. 물론 들어주는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만화며 동화에 등장하는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만나면, 이런 저런 해설을 하며 잘난 척도 좀 했던 것 같고. 어린 내게 신화는 상상의 보고이자 이야기 보따리로서 충실히 그 역할을 해주었다.

갓 대학에 입학해 영미문학의 배경이라는 전공필수 과목에서 다시 만난 신화는 헤브라이즘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영미 문학 양대 산맥의 그늘진 골짜기였다. 물론 헬레니즘이 헤브라이즘에 전사했다는 결론은 내가 내린 것이 아니다. 영미 문학의 근간이 된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하게 되어 있던 강의 계획서를 읽고 나름 기대에 부풀었던 터였으나, 강단에 선 교수님의 첫 일성을 듣고 그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열혈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한 학기 내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이 왜 기독신앙에 비해 미미한가, 또는 헤게모니를 빼앗겼는가를 설명하고 갖가지 교회 모임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는 학생들의 전도에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에, 학기 도중에 어느 용감한 학생이 강의 시간에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이라며 교수님께 익명의 항의 서신을 보내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항의 서신을 공개하며 노발대발하는 교수님을 보며 결국 속으론 그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 분의 성향대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영향을 논하라는 마지막 기말고사를 성경 문구로 도배를 하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점수는 A+이었지만 입맛이 썼다. 그리고 나는 유학을 앞두고 교수님이 추천서를 써주시며 강권한 교회 모임을 결국 나가지 않았다.

다시 20 여 년이 흘러서, <그리스인 이야기>를 만나 신화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니 그간 신화라는 단어를 나는 영 엄한 데서 자꾸 만나는 바람에 멀미를 느꼈던 듯 하다. 창업 신화, 성공 신화, 주식 투자의 신화, 마케팅 신화, 서울대 합격 7 8기의 신화 등등. 이런 장삿속 가득한 선전문구에서 만난 신화들을 때로는 부러워하고 대게는 혐오하며 아둥바둥 살았던 30대도 이제는 지나 보냈다.      

그리고 맞은 성년의 사춘기 마흔에 들어서서, 참 오래도록 무심했다 다시 만난 신화 속의 인물들은 내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전처럼 가볍게 다가와 아폴론과 다프네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피그말리온의 사랑을 달콤하게 전해주지도 않는다. 이제는 달콤한 처녀들의 사랑과 신들의 재미난 소동이 아니라, 쓰라린 운명에 짓밟혀도 그저 살아갈 뿐인 그녀들, 모험이 끝나도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치열히 싸워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사내들을 응시하게 한다. 메데이아의 분노와 죄악을 연민으로 바라보게 하고, 아이아네스의 덧없이 짧은 3년간의 왕위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보게 한다.

용감한 아테네도, 빛나는 아르테미스도, 최고 신 제우스도 아닌, 어둠의 여신이자 교차로의 수호신인 헤카테와 경계의 신 헤르메스를 중심에 올려 본다. 우리는 매 순간 위태롭게 또는 자유롭게 경계에 서 있으며, 구름 한 조각으로 칠흑 같은 어둠과 휘황한 달빛은 한 밤에 공존함을 알아야 하는 그런 시기를 맞은 것이다. 변화가 곧 삶이고, 도전이 곧 살아 있음이며, 기나긴 항해 끝에 마침내 보이는 항구는, 곧 다가올 치열한 전쟁을 의미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나에게 이제 신화는, 안일한 일상에 만족하려는 나를 쿡쿡 찔러대는 날카로운 창 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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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0.13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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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18:13:38 *.62.164.78
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단숨에 읽히네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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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20:54:27 *.177.81.59

예비9기와 9기의 경계에 선 우리들~

이 도전도 살아 있음이겠죠.

힘차게 쿡쿡~찔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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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21:02:42 *.20.137.74

반갑습니다. 자꾸 찔려서 많이 힘든 신화 읽기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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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21:14:48 *.58.97.136

문학을 전공하셨나봐요.  역쉬 그리스 신화에 대한 깊이가 남다릅니다.

저도 함께  쿡쿡 찔러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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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16:35:19 *.91.142.58

저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전까지 찾아가면서 ^^;

영문학도이셨나봐요... 많은 가르침 주세요!

 

남은 레이스도 힘차게 홧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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