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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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의 알람이 울린다. 오후 5시, 카페 간판불을 켠다.
창가에는 훤칠한 남자가 테이크아웃 잔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다정하다. 곧 일어날 모양이다. 3시간 예약된 세미나실에는 삼삼오오 모여든 그녀들의 영화 관람이 진행 중이다. 호호 깔깔 재밌나 보다. 커다란 함성과 웃음이 이어진다. 그리고 구석 테이블. 초등학교 동창 녀석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후배라며 소개해 준 우락부락 남자는 맥주병 뚜껑을 반으로 접고 있다. 일곱 개째다. 함께 여행사 일을 한다는데 일단 외모로 먹어준다.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대화는 어렵다.
“일 때문에 이쪽에 자주 오는데 가끔 들러야겠네.”
“어디서 마시고 온 거야?”
“시청 앞에서 거래처 사람들이랑 점심 먹으면서 반주로 쫌 마셨어.”
“또 마셔도 괜찮아?”
“맥준데 뭘. 저녁에 또 술 약속도 있어. 너도 한잔해라.”
“근무 중이니까 한 잔만.”
“너 이혼했니?”
“어? 아니. 누가 그래? 할 뻔했는데 다시 잘살고 있어.”
“그래?”
“응.”
이 녀석이 간보러 왔나 보다. 참나원. 나원참. 원나참. 이혼 안 하길 잘했단 생각을 이런 때도 하는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한때는 같은 공간에서 먹고 놀고 했을, 이제는 40대 후반으로 달려가는 중년 남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지만, 혼자냐고 묻는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내가 원한 게 바로 이런 건 아니었나, 하고.
그 비슷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많은 설명이 생략되어도 불편하지 않은, 부담 없이 만나고 언제든 잘 헤어질 수 있는, 꾸미지 않은 모습이 편한,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친구는 대번 아니었을까? 살짝 어려운 관계를 원하나? 거리유지가 가능한 예의 바른 사람? 폭넓은 교양? 언행의 품격? 술 얘기 말고 책 얘기 나눌 수 있는? 아님, 외모? 에이 아무리. 사춘기도 아니고 외모는 무슨. 그건 아니지.
영화를 함께 보던 그녀들이 길 건너 고깃집으로 향한다. 더치페이를 자연스럽게 하는 편안함이 나쁘지 않았다. 저 정도면 맘에 맞는 여자들이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환한 미소의 동그랗고 자그마한 여자가 들어와선 창가의 남자에게 다가간다. 고개를 돌린 훤칠한 남자의 손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여자의 머리부터 어깨며 팔, 손, 다시 이마, 뺨, 턱, 목을 골고루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장난이 아니다. 앗, 늘씬한 외모의 나쁜 손, 바로 저거였다.
난 속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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