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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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부터 책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책 읽기가 시들해지면 글쓰기에도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에서 책 한 권이 반짝였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습니다. 에리카 종의 말이 맞았습니다.
“책은 세상 속으로 외출한다. 신비롭게도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여행을 하다가 누군가 이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그때에 가 닿는다. 우주적 힘이 그러한 조우를 인도한다.”
작년 여름 즈음, 신문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을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강연에서 한 참석자가 선생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해 물었고, 신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책읽기는 먼저 내용을, 그 다음에는 집필한 필자를, 마지막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 ‘3독’이다. 한 가지 책을 꼽을 수는 없지만 자기 성찰로 돌아오지 않거나 자기변화로 연결되지 않는 독서는 정보 수준에서 끝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빨리 읽을 수 없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물론이고 저자의 존재감부터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과 책의 내용은 제게 성찰의 거울이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출소를 1년 반 정도 앞둔 어느 봄날, 선생님은 ‘작년 가을 특별구매 때’ 사두었던 마늘을 벗겼습니다. 같은 겨울을 같은 공간에서 보냈음에도 마늘 한통을 채운 여섯 쪽의 모습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썩어 문드러져 냄새나는 놈, 저 하나만 썩는 게 아니라 옆의 쪽까지 썩게 하는 놈이 있으며, 새들새들 시들었지만 썩기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그나마 매운 맛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놈도 있으며, 폭싹 없어져 버린 놈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늘 본연의 생김새와 매운 맛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싹을 키우고 있는 놈입니다. 교도소의 천장 구석에 매달려 그 긴 겨울을 겪으면서도 새싹을 키워온 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겨울이 찬바람에 실려 있듯이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면 마음도 겨울에 듭니다. 저는 작년부터 겨울 같은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겨울이 내년까지 계속 되리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길지 모르지만 더 짧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겨울이 걱정되기 보다는 이 겨울에서 얻어야 할 깨달음을 놓칠 것을 경계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선생님의 마늘 이야기가 마음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거나 썩어 문드러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주변까지 썩게 만들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입니다. 좀 더 단단해지고 나다운 향기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재력을 새싹처럼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없지 않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춥고 어둔 마음의 계절의 바탕색은 ‘눈록빛 새싹’일 것입니다.
이 겨울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는가는 나의 몫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충실히 보내면 언젠가 이 겨울이 찬바람 속에서 성장했던 계절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책이 읽히지 않음을 답답해할 때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곧추 세워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 신영복
* 오늘 소개한 책 : 신영복 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년
* 홍승완 트위터 : @SW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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