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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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유형선
헌법재판소장 선출을 놓고 방송은 연일 뉴스를 쏟아낸다. 나처럼 법이나 정치에 문외한인 사람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이동흡’ 이라는 호칭과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이 분이 언론에 나왔나 보다. 시끄러운 것을 해결하라고 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명색이 법관인 분을 놓고도 이리 나라가 시끄러우니 안타깝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동흡’을 넣자마자 온갖 시끄러운 글들이 한가득 올라온다. 덩달아 내 머리도 시끄러워진다.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내친 김에 서재를 총동원하여 때 아닌 법 공부를 시작해 본다. ‘법’하면 떠오르는 상징은 역시 ‘법의 여신’이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여신. 눈앞에 보이는 욕심에 현혹되지 말고 저울로 재듯 공명정당하게 법의 힘을 휘두르라는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법의 여신’ 이름을 찾아보니 로마 신화에서는 ‘유스티티아Justitia’,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스트라이아 Astraea’라고 불리었으며, ‘정의 Justice’ 라는 단어의 어원이라고 한다. 요컨대 법과 정의는 샴쌍둥이 처럼 영원히 붙어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아스트라이아 여신의 이야기는 처녀자리 별자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우스 신과 거인 타이탄족의 여신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트라이아는 정의의 여신이었다. '금의 시대'에는 신과 사람들이 어울려 지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지상에 계절이 생기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자 신들은 지상을 버리고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아스트라이아만은 인간을 믿고 지상에 살면서 열심히 정의의 길을 설명하였다. 이 시대를 '은의 시대'라 한다. 이윽고 '동의 시대'가 되자 인간은 거짓과 폭력을 일삼게 되어 친구와 부모 형제들까지도 피를 흘리며 서로 죽이게 되자, 아스트라이아도 끝내 참지 못하고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처녀자리는 이 아스트라이아의 모습이라고 한다. 사실 아스트라이아는 '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 서양에서는 정의의 여신이 칼과 천칭을 들고 있으나, 옛 별자리 그림의 처녀 자리는 ‘보리 이삭’을 든 여신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노동의 결과물 ‘보리이삭’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는 대지야 말로 진정한 처녀의 모습이며 하늘의 별처럼 우러러 경배해야 할 여신인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칼’과 ‘저울’이라는 법의 상징을 ‘정의’라는 덕목으로 기억하기 보다 ‘눈먼 권력’ 정도로 여기고 있다. 전국민의 77%가 법원 재판이 불공정하다는 시민단체 여론조사도 있었다. ‘사법 테러를 미화한 허구’라는 대법원의 유감표명에도 불구하고 영화 ‘부러진 화살’은 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원동력이 되어 34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 모았다. 최근에는 성접대를 요구한 검사도 있다고 하고 뇌물로 벤츠를 선물 받은 판사가 있다고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법의 여신'은 하늘의 별은 커녕 땅에 떨어져 지하실로 숨어버려도 시원찮을 형국이다.
법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길은 단 한가지 방법뿐이다. 법의 정신 근본으로 돌아가 샴쌍둥이 ‘정의 Justice’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해 힘써야 한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저서 <법의 힘>에서 법의 근원적 의미인 정의와 힘의 관계를 함께 회복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힘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 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의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1]
정의의 힘과 법의 재결합을 위해 ‘법의 여신’ 두 손에 칼과 저울 대신 ‘보리 이삭’을 쥐어주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인간의 노동과 대지의 생산력이 어울려 추수와 축제의 환희를 그려내는 ‘보리 이삭’을 쥔 여신상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 사법부 앞에 세워진다면 어떨까? 권력을 위해 힘쓰는 법이 아니라 땀 흘려 일하는 자를 위해 사력을 다하는 법이야 말로 진정한 정의이며 진정한 힘이라고 알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여 밤하늘 처녀자리 별자리 같이 맑고 투명한 법의 정신을 다시 세운다는 선언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한가지 더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사전에서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에게는 ‘아이도스’라는 자매가 있다고 한다. 이 ‘아이도스’라는 말의 의미가 우리말로 ‘염치’라고 한다. ‘염치’란 ‘청렴하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헌법재판소장’처럼 높으신 자리에서 법을 판단하시는 분이 꼭 기억했으면 싶은 아름답고 고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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