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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1일 09시 59분 등록

장자의 철학 (, 깨어남, 그리고 삶)

* 강신주 지음, 태학사, 2004.08.28

1. ‘난세의 소통 인문학(저자에 대하여)

 

강신주.JPG

■ 강신주 (1967~)

 

경남 함양에서 출생했다. ‘장자 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스로 강단에서 내려와 대중 아카데미 강연과 저작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그에게 축복이며 소명이다. 대한민국 철학자 중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강연한 사람이 흔치 않을 정도다. 자신만의 색깔을 올곧게 담아낸 그의 책들은 우리 삶에 무척이나 밀접하게 파고드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아프고, 가렵고, 통쾌하고, 즐겁다.

 

저서

장자의 철학

공자 & 맹자

장자 & 노자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중국 철학 이야기

과학이 나를 부른다

스승 이통과의 만남의 대화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중국 철학 이야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회남자 & 황제내경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 VS 철학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관중과 공자

철학의 시대

김수영을 위하여

 

장자.JPG

■ 장주 (BC 370 ~ BC 280)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다. 이름은 주(). ()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한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는 학설이 있다. 장자는 공자, 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그 기본적 사상의 중심은 당시 지배자의 지위에서 몰락하고 있던 사상가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론에 있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 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 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眞人)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無知)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 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의 생사(生死)를 기()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2. ‘장자의 철학(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서론

 

□ 전국시대는 통일된 공동체라는 이념과 시선 속에서만 이 시대는 혼란의 시대로 보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인간의 삶과 사상이 가장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생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 14)

 

Ü 신영복 선생은 강의한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적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 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회에 살 수밖에 없었던 이런 사정은 장자에게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자가 2000여 년 전 송이라는 작은 나라 속에서 사회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속에서 사회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살아야만 하는 우리가 장자에게 지혜를 얻으려는 이유도 바로 그가 우리보다 앞서 이런 사회 속에서 살려고 시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p. 15)

 

Ü 세상 너머의 존재로 인식하던 장자는 실로 사회적 인물이었다. 자신의 관념, 사유, 존재 이유를 보편화 시켜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들였던 철학자였다. 반신선이 된 경지로 보는 경향을 제거하고 들어가자.

 

□ 그의 철학이 지닌 궁극적 귀결이 사회의 이론적 기초를 모색하는 데 이르게 된다는 점이 간과 되어서는 안 된다. (p. 16)

 

□ 장자가 문제 삼고 있는 소통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역량에 존재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사소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활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p. 16)

 

주체와 타자 사이의 무매개적 소통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합일이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생성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소통(=무매개적 소통)은 주체가 일종의 자기해체를 통해 타자로 향하는 자기조절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체의 자기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 (p. 18)

 

Ü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선이해, 고정된 관념에 대한 근본적 해체 없이는 주체와 타자와의 바른 소통이 전제될 수 없다는 말이겠다.

 

□ 소통을 강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타자와의 소통을 강조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이해나 자의식을 결코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이해를 버리지 않은 채 논의되는 소통은 허구적 소통에 불과한 것이다. 소통은 선이해라는 매개와는 양립불가능한 무매개적인 것이자 고착된 자의식과는 무관한 비인칭적impersonal인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바로 소통과 선이해, 무매개와 매개 사이의 기로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 선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고착된 자의식을 비울 것인가? 아니면 자의식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서 소통을 폐기할 것인가? 장자는 우리에게 비움을 권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매개적 소통 쪽에 서게 된다. (p. 19)

 

Ü 인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인간 이탈을 꿈꾸는 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지구의 무게와 같이 달고 사는 자. 그 사람에게서 나온 담론, 그것이 장자다.

 

□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는 가능한 것일 수 있는가? (p. 20)

 

Ü 이 질문에 우리는 카잔차키스의 희곡 붓다를 참조 할 필요가 있다. 카잔차키스는 마법사의 대사를 통해 자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들은 단지 감옥을 바꿀 뿐이다. – 이제는 더 이상 돌, 회반죽, 그리고 철근의 벽이 아니라 희망과 꿈의 벽이지. 그들은 감옥을 바꾸는 거야. 그리고 이것을 자유라고 부르지!’ 또한 어르신의 입으로 말한다.

 

너는 강하기 때문에 아무 목적 없이 논다. 너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외톨이로 혼자 논다. 너는 시간의 둑에 탑을 세우고 물과 모래로 신, 아들, 그리고 손자를 만든다. 너는 네 눈을 뜬다. 그러면 피조물들이 살아난다. 너는 네 눈을 감는다. 그러면 그들이 사라진다. 너는 춤춘다. 나의 가슴아, 너는 황야에서 춤춘다.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너는 아무도 증오하지 않고 너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너는 자유롭다!’

붓다는 신을 극복한 자유의 인간인가? 니체는 신을 죽인 인간인가? 카잔차키스는 신에 대항했던 인간인가? 우리는 신과 자유에 어떤 시선을 하고 있는가? 그 어떤 인간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이것은 진리다. 시간이 진리인 것과 같다. 그러나 자유는 인간의 북극성이다. 나침반의 바늘이 떨며 늘 그곳을 지향한다. 지향할 뿐이다. 다가설 수 있으나 갈 수 없는 곳이다. 인간에게 자유는 어쩌면 그런 곳인지 모른다.

 

□ 본 글은 장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삶과 소통이라는 두 범주에 있었다고 보고 내편을 중심으로 이것을 체계적으로 논증하려고 의도된 것이다. (p. 21)

 

□ 각각의 이야기에서 도출한 동일한 결론 주체의 자기변형’ self-transformation 이라는 교훈이다. (p. 23)

 

□ 오히려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은 우리가 매개에 의존하는 마음인 有待(유대)의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본래성, 즉 마치 거울처럼 어떤 매개에도 의존하지 않는 無待(무대)의 마음으로의 변화다. (p. 24)

 

Ü 무대는 타자가 없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매개에 의존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저자)

 

□ 장자철학의 핵심이 주체의 자기변형, 나아가 그것을 통한 타자와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에 있다고 보고 이것을 논증하려고 의도된 글이다. (p. 25)

 

1부 장자, ‘내편의 고유성과 장자철학의 위상

 

□ 장자는 대략 기원전 355~275년경에 살았던 인물 (p. 32)

 

□ 장자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황로사상과는 전적으로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정치적인 인물, 권력과 부를 혐오했던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p. 33)

 

Ü 재상의 자리를 제의 받고 장자는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고 했다.

 

□ 노자와 장자가 최초로 함께 묶인 시기가 언제인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최초로 그들을 도가에 귀속시킨 사기와 회남자는 모두 황로사상과 유가사상, 즉 지방분권적 세력(혹은 공신 기득권 세력)과 중앙집권적 세력이 생사를 걸고 싸우던 시대에 쓰여졌던 저술들이다. 결국 이런 시대적 압력으로 인해 사마천은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경향과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경향으로 이분화해서 先秦 사상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 34)

 

Ü 유가에 속하는가 아니면 도가에 속하는가라는 거친 이분법적 도식은 한서에 가서야 부분적으로 수정이 가해진다. (저자)

 

□ 소와 말에게 네 다리가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이고 말의 머리에 굴레를 매는 것과 소의 코를 뚫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이다. (p. 38)

 

Ü 기절할 정의다.

 

□ 장자가 아닌 장주가 사용되고 있는 첫 번째 에피소드

 

장주의 집은 가난해서 그는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려고 갔다. 제후가 말하기를 좋다. 나는 곧 내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얻게 되는데, 너에게 삼백금을 빌려주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장주가 말했다.

 

붕어야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저는 동해의 물결 속에 노닐던 놈입니다. 선생께서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이 있거든 제게 부어 살려 주십시오.

그러지, 내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을 설복시켜 서강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마중하도록 하겠다. 괜찮겠느냐?

저는 제가 늘 필요한 물을 잃고 있어서 당장 몸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다가는 차라리 저를 건어물전에 가서 찾는 편이 옳게 될 겁니다. (p. 41)

 

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수고로운지를 여실히 체험했었던 철학자다. (저자)

 

□ 아,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고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p. 43)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그 사마귀를 노리는 이상한 까치, 그리고 까치를 노리는 장자, 장자는 이런 연쇄적 과정에 깜짝 놀라 석궁을 버리고 그 자리를 피해 되돌아 나왔다.

 

결론적으로 장자의 깨우침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 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 맺음은 청연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결국 장자의 철학적 문제의식은 어떻게 우리가 타자와 관계하면서도 삶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p. 44~45)

 

□ 단지 철학은 사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보편적인 질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데서 다른 학문과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p. 46)

 

□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과 시작과 끝이라는 관념을 해체한 사람, 외물과 적절히 소통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을 달성했던 사람. (p. 49)

 

□ 장자가 파격적인 문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구체적인 사태에 매몰된 세상 사람들과는 함께 엄숙한 말을 나눌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p. 51)

 

□ 그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삶과 그것의 진실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p. 52)

 

Ü 장자에 대한 우리의 고착된 선이해를 무너뜨린 후 장자를 읽으면 그는 그의 그 큰 가슴으로 우리를 안아줄 듯 하다.

 

□ 장자의 이야기가 자유롭고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가 다양하고 복수적인 타자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장자를 읽고 있는 우리들이 장자처럼 무한한 타자들과의 소통을 경험한 적도 또 그런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마음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p. 53)

 

2. , 잡편과 내편의 사상적 차이

 

□ 내편이 시기적으로 외, 잡편에 앞서 있다는 것, , 잡편의 저술들 중 술장파 혹은 장자학파의 저술들이 내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될 수도 있다는 점 (p. 67)

 

소통이라는 개념은 장자에서 왕래함, 꿰뚫음, 정통함 등을 의미한다. 결국, 소통이란 개념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과 대립, 즉 차이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의미를 지니는 개념이다. (p. 69)

 

□ 이런 충돌에서 주체와 타자 양자 중 어느 하나가 제거되는 극단적 대립을 피하고 공존과 조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의식의 자기 동일성을 완화 내지는 해체해야만 한다. 따라서, 소통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항상 고착된 자의식이 문제가 되는 지점일 수밖에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p. 70)

 

Ü 듣는다는 행위는 그래서 소통의 출발점이 된다. 타자가 하나의 우주임을 인지하고 그 우주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으로 소통은 시작된다. 들어라. 타자를 듣고 자신을 해체하여 타자의 의식으로 자신의 자의식을 이동시켜라.

 

□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길러야 함 (p. 71)

 

Ü 상대방의 젖은 신발에 자신의 발을 구겨 넣어라.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서야 어찌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성인은 살아 계신 분입니까?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

그렇다면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이겠습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버린 것.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손의 감각과 마음에 호응하여 이루어지는 것. (p. 74)

 

□ 자신이 직접 대면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소통하기 위해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 함을 간접적으로 권고하고 있는 것 (p. 75)

 

□ 치우친 견해에 입각한 지식인들과 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학설들에 의해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p. 78)

 

□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면 나를 포함한 개별자들에게는 결코 불변적인 귀함이나 천함이 없음을 알게 되고 반면 부분적인 관점 혹은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면서 상대방을 천하다고 생각한다. (p. 79)

 

Ü 바로 이 지점에서 장자가 말하는 self – transformation 이 필요하겠다. 저자는 이를 일러 주체의 자기변형이라 했다.

 

□ 결론적으로 의 관계를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합리적 도론의 입장에는 개별자의 가변성과 유한성 그리고 전체의 불변성과 무한성이라는 구별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는 유한한 개별자들을 세고 그것들을 논의하고 그것들이 조직되는 원리를 규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와 다른 개별자들이 함께 속해 있는 유동적 전체는 무한하고 따라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런 무한한 유동적 전체를 유한성에 근거한 이름을 확장함으로써 도라고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우리가 ()이라는 말을 무한히 큰 수에 대해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p. 82)

 

□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모르는 법이다. 그래서 성인도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했던 것이다. (p. 85)

 

Ü 신비적 도론의 예다.

 

□ 진정으로 도를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도에 대해 말하는 자는 도를 알지는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p. 86)

 

□ 새로 생긴 잎과 지는 잎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의 뿌리는 그런 변화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의 본질을 체득한 사람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을 (근본적인 것에) 수반하는 것들로 여길 뿐이기 때문이다. (p. 88)

 

Ü 그러니 깨달아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겠다. 이 엄청난 무책임한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아서라, 깨닫지 못함이 낫겠다.

 

□ 이 세계 내의 모든 개별자들은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 그것들은 오직 이런 자기 생산적이고 세계 내재적인 도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별자들은 도의 자기 생산성의 결과물들이다. 그래서 이 순수하고 무한한 자기 생산성의 흔적을 모든 개체들은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도를 얻은 , 이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유한자들은 본질적으로 이 무한한 도의 자기 전개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근거로서 이 무한성을 유지해야 한다. 유한자의 입장에서 이 무한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도의 무한한 자기 생산성을 닮아 있는 무한한 소통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p. 90~91)

 

Ü 이래서 노자가 깊다고 하였구나. 그것이 바로 이다. 무한의 세계 즉, 존재 너머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한성을 지녀야 자신의 유한을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의 해석도 가능한가. 융은 유한한 자기 인식이 전제되어야 무한의 무의식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했다. 연결되는구나.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단일성과 무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융과 장자, 그리고 카잔차키스. 이들은 인간의 자유라는 단어에 생이 얽혀 있는 사람들이다.

 

□ 테제 (p. 96)

 

Ü these : 원래는 '하나의 계기'를 뜻하는 헤겔 철학의 용어로, 정립(定立)이라 번역되는 말.

증명되어야 할 주장, 명제를 의미하던 것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일정한 전략, 전술 단계에서 혁명운동의 방향, 형태, 슬로건 등을 결정하는 방침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대표적이다. 레닌은 4월 테제를 통해 소비에트공화국의 건설, 사유재산의 몰락, 토지의 국유화, 군대 관료 경찰제도의 폐지와 같은 주장을 발표했다.

 

한편 특정한 긍정적 주장에 대응하는 특정한 부정적 주장을 안티테제 (反定立, antithese)라고 한다. 이 안티테제와 테제가 모순을 일으키면 그것의 통일된 상태인 진테제 (synthese)가 된다. 논리의 전개과정에서 테제는 긍정, 안티테제는 부정, 진태제는 부정의 부정에 해당한다.

 

□ 규제적 이념 regulative idea (p. 97)

 

Ü 각주) 자타 간의 대립과 갈등을 막을 수 있는 이념 혹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이들 제자백가들은 공통적으로 도라고 불렀다. 물론 동일하게 쓰이는 도라는 이념이 각각의 학파들에 잇어 상이한 내용으로 전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공자의 경우 그것은 주체의 수양과 충심의 실천으로 실현 가능한 것이고 묵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철저한 평등박애와 이익공유를 통해서 실현 가능한 것이었고 한비자에게는 강력한 군주권 확보로 실현 가능한 것이었고 맹자에게 있어 그것은 주어진 본성으로의 복귀로 실현 가능한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노자에게 있어 그것은 세계의 존재론적 근거로의 복귀로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p. 98)

 

도는 직접 걸어가야 이루어진다. 道行之而成 (p. 104)

 

Ü 관념에 의존하거나 인식론에 사로잡힌 도는 도가 아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땅 위에 나의 처지 위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나의 도의 전개에 따른 것이다.

 

待對(대대) 관계 문제

중국 철학 전통은 기본적 지향점으로 집체부쟁을 갖고 있다. 정체쟁의의 서양철학에서 유들의 본편성향에 호소했다면 집체부쟁의 중국철학은 유들의 집체성향에 호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버지라는 유와 자식이라는 유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집체를 형성함으로써 의미가 있고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들은 강조한다. 우리는 이런 유들의 집체성향을 대대 관계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p. 110)

 

□ 어느 한 시점에 장미가 붉다고 할 때, 희랍철학자들은 그렇다면 붉은 장미꽃은 붉을 뿐이지 노랄 수 없다는 것에 만족한다. 반면 선진철학자들은 붉은 장미꽃도 언젠가 시들어 노랗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붉은 장미에게서 노랑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장미꽃이 동시에 노랗거나 붉다는 모순을 중국철학자들도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 중국철학의 철학자들은 서양철학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성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p. 112)

 

□ 저것과 이것이라는 대대 관계가 자신의 대립성을 상실하게 된 상태를 도의 지도리라고 말한다. 지도리가 원환의 중심을 얻게 되면 무한한 외물에 대응할 수 있다. (p. 114)

 

Ü 이 말은 조금 어렵다. 공부가 모자라다.

 

□ 생사 관념은 자의식의 동일성의 최종적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착된 자의식의 최종적 기저에는 살아있는 나라는 자기 동일성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다.

 

장자가 벗어나려고 하는 생사는 자연사적 사실인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삶을 즐거워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인간의 고질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통해서 정립된 관념으로서 삶과 죽음의 문제다. 이것은 생사 관념의 문제가 심론과 수양론의 영역에서만 고유하게 다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이 바로 생사 관념의 문제를 대소 관념의 문제와 구별하지 않고 있는 외, 잡편의 합리적 도론과 신비적 도론으로부터 내편의 고유성을 확보해주고 있다. (p. 115)

 

Ü 내편이 장자 생사 관념의 고유한 사유 체계임을 알자.

 

□ 수양 self – cultivation , 서양 철학이 세계의 본질이나 현상적 법칙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라면 오히려 수양론을 강조하는 중국 철학은 세계가 아닌 자기를 장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수양론은 자신의 마음을 문제로 삼는다.

 

Ü 서양은 세계를 장악하려는 시도, 중국 철학은 자기를 장악하려는 노력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 vs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고착된 자의식, 언어, 인식이라는 삼중의 꿈 속에 있으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는 이런 꿈에서 깨는 방법으로 이런 꿈이 작동하는 원리인 대대 관계의 논리를 파악하고 이것을 마음 속에서 실제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 117)

 

Ü 이분법적 거친 분류를 자의식에서 제거하고 서로가 선이해와 자의식을 해체한 뒤에 만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라 생각하는 장자.

 

3. 동시대의 사상사적 경향과 장자철학의 위상

 

□ 동시대 살았던 중요한 철학자들로는 양주, 맹자, 혜시, 송견, 후기묵가 (p. 121)

 

□ 모욕을 당해도 치욕으로 여기지 않는다. 見侮不辱(견모부욕)는 송견의 유명한 주장은 情欲寡淺(정욕과천)이란 그의 일반 주장으로부터 직접 연결된다. (p. 124)

 

사람들은 모두 알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알 수 있는 까닭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아는 바가 저것(=타자)이라면 그 알게 되는 이유는 이것(=마음)이다. 수양되지 않은 이것(=마음)이 어떻게 저것을 알 수 있겠는가?’ (p. 126)

 

Ü 송견 주장의 핵심이다. 올바르지 못한 마음의 산악인은 자신의 아이젠이 얼음짝에 먹혀들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 장자에 따르면 송견은 온 세상이 칭찬해도 고무되지 않고 온 세상이 비난해도 위축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과 타자의 구분을 확정하고 이에 근거해서 사회적 명예와 불명예가 비본질적인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p. 126)

 

Ü 껍데기로 사는 이들의 논리를 꽤뚫어라. 그들이 생각하는 본질은 사실, 인간의 본질을 한참 피해간 세상의 현혹이었음을 알리라.

 

너 자신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너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교육된 비본질적인 욕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 132)

 

Ü 나의 욕망이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제대로 나를 위한 욕망을 추구하려면 우선 나에 대한 바른 시선부터 세워야 한다. 그 방법은 수양과 자기검열이다.

 

□ 장자, 관계 맺기의 첫 깨달음 : 조릉의 사냥터 (p. 131)

 

Ü 매미 <- 사마귀 <- 까치 <- 장자

 

□ 고자에 따르면 맹자처럼 사람의 본성을 인의로 규정하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버드나무를 그것을 죽여서 만든 죽은 그릇과 같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p. 135)

 

□ 말 못하는 버드나무의 입장에서 오히려 술잔이 된다는 사태는 폭력에 가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p. 136)

 

□ 혜시의 사상

- 가장 큰 것은 외부가 없는데 이것을 가장 큰 일자라고 부른다. 가장 작은 것은 내부가 없는데 이것을 가장 작은 일자라고 부른다.

- 해는 하늘 정 중앙에 있을 때 지고 있는 것이고 사물들은 살아있을 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 남쪽은 한계가 없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혜시에 따르면 산은 높음과 낮음이라는 규정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또 이와 마찬가지로 연못도 높음과 낮음이라는 규정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문제는 산이 무엇과 관계하고 있는지 또 연못이 무엇과 관계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p. 140~141)

 

Ü 물리적으로 높다는 것은 우리 인식에서 출발한 고착된 자의식이다. 높다, 낮다라는 말은 규정되어질 수 없는 언어적 제약을 품고 있으며 산을 오르는 일은 수직 운동이라는 단편적 사실에 더하여 일상을 거스르는 인식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그 인식의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 부인은 그 집의 종과의 관계에서 귀할 수 있고 남편은 한 나라의 군주와 비교해서는 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별자들을 모두 사랑한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 위계를 해체하고 개별자들이 무한한 관계에 들어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이 점에서 혜시의 논리는 송견의 사회적 모욕을 당해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見侮不辱의 논리와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p. 141)

 

Ü 사회적 가치는 비본질적인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질적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 우리의 삶이 만약 불가피하게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보존하고 중시하기 위해서 타자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유한자로서의 우리 삶은 타자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는 타자와 올바르게 관계 맺기 위해서는 타자의 삶에 들어가서 그 타자의 삶의 규칙에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p. 143)

 

Ü 타자의 삶의 규칙을 따르는 것. 관계가 끝나면 그 규칙은 위배되어도 좋은 것인가. 그 규칙에 나는 없다. 나를 배제시키는 것이 결국 장자의 교훈을 따르는 것인가.

 

禽獸(금수), 그들은 단지 나와는 삶의 규칙이 다른 타자일 뿐이고 따라서 진정한 소통의 대상이다. 소통은 나와는 삶의 규칙이 다른 타자에 대해 요청될 수 있는 것이지, 나와 삶의 규칙을 공유한 타자에 대해서는 요청될 필요가 없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 사유의 고유성은 자신의 삶의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와의 소통과 그 가능성의 역량으로서의 마음을 사유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p. 145)

 

Ü 장자 사상의 핵심. 열린 소통. 과연 이 시대의 화두로 삼을 만 하다.

 

2

장자 철학의 구조와 그 철학적 함축

 

1. : 자의식, 언어, 인식의 문제

 

□ 마음에 대한 물음은 불가피하게 마음에 의해 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사정을 마음의 자기초월성, 마음의 자기지시의 역설이라 부를 수 있다.

 

마음이 자신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이렇게 대상화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은 이미 대상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마음은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자신을 묻지 않고 대상에 대해 물을 때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마저도 물어지기 전에 애초에 마음에 들어와 있어야 하니 말이다.

 

삶의 신비는 이런 분명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설이 마치 역설이 아닌 듯이 살아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p. 149~150)

 

Ü 이래서 철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음은 우리 자신에게 가벼운 문제로 사유할 수 있지만 장자에게는 심각한 고민 거리였다. 매일 대하는 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장자와 같이 이렇게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접근 할 수 있는가.

 

큰 지혜는 여유로워 보이고 작은 지혜는 흠을 찾는 듯이 보인다.’

마음이 자신이 하려는 것에 몰입할 때는 그 마음을 회복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봉해져 있는 것처럼 막혀 있기 때문이다.’ (P. 151)

 

□ 다양한 마음의 현상태들과 그 근저에 있는 순수한 마음 사이의 관계를 장자는 음악은 빈 곳에서 나온다.’는 비유로 암시하고 있다. 피리를 생각해 보자. 모든 피리는 피리로 기능하기 위해서 속이 비어 있다. 바로 이렇게 비어 있기에 피리는 다양한 음악을 생산해 낼 수 있다. 피리가 소리를 그치면 비어 있음이란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피리의 본래적인 비어 있음은 피리의 울림과 그침을 넘어서 있다. 결국 피리의 본래성은 음악이 울려 퍼지든 혹은 그치든 간에 자신의 비어 있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 153)

 

Ü 소동파의 <珡詩>

 

만약에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

갑 속에 두었을 젠 어이 해 안 우는가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안 들리나

 

□ 문제는 마음이 분명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지만 그 자체의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53)

 

그것이 없다면 나도 없고 나가 없다면 취할 바도 없게 된다. 이것은 얼마간 사태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지만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시켰는지를 알지는 못한다. 진정으로 명령하는 어떤 (=眞宰)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일한 난점은 우리가 그것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이 작동하는 것은 이미 믿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볼 수는 없다.’ (p. 154)

 

Ü 그것은 다양하게 드러나는 마음의 현상태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 근거는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다양한 마음들이다. 그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다 보면 나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아쉽다. 그러나 그 마음은 좀 처럼 드러나는 경우가 없다.

 

□ 나라는 고착된 자의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무화시켜야 한다는 논의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

 

무화되는 대상은 마음 자체가 아니라 이 마음에 깃들어 있는 나라는 고착된 자의식이다. 이 점에서 무화된 마음(=무대의 마음, 허심)은 나라는 인칭성 personality이 제거된 비인칭적impersonality 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p. 157)

 

Ü 내가 자의식을 버리기 위해서는 지금껏 지닌 모든 지식, 사념, 사견 들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타자와의 소통은 과연 가능할까.

 

우리의 마음이 사과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보았던 강물에 가 있다면 결코 눈은 사과를 보지 못한다. 결국 눈이 사과를 본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그 사과를 보는 눈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장자에게 있어 마음은 이처럼 현상적으로는 항상 감관의 소통에 수반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지만 항상 그런 소통을 지배하고 있는 진정한 주인이다. 결국, 장자의 모든 사유는 이런 진재, 즉 무대의 마음을 명확하게 확립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p. 158)

 

Ü 나를 진짜 지배하는 것은 나인가. 또 다른 무엇인가. 나라면 자의식이겠고 또 다른 무엇이라면 이제껏 나의 자의식과는 무관한 무엇이겠다. 무엇인가? 그것 조차 내 마음에 있는가? 내 마음에 없다면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로 와서 나를 지배하는가?

 

□ 진재란 사유주체나 인식주체를 말하는 것인가? 장자에게는 진재란 사유주체나 인식주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마음은 특정한 주체라는 인칭성을 넘어서 있는 비인칭적인 소통역량이다. 반면 사유나 인식은 인칭성이라는 층위에서 즉 나는 나다라는 고착된 자의식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 만났던 a를 오늘 다시 만났다고 하자. 이 경우, 오늘 만난 a를 어제 만난 a와 동일하다고 사유하거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작동하는 고착된 자의식이 시간의식을 함축하는 사건이다. (p. 159)

 

□ 분명 사유나 인식은 표면적으로 무한한 것처럼 작동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자유롭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나 인식의 이런 무한성은 표면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나 인식은 나라는 유한한 고착된 자의식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장자에게 있어 나라는 고착된 자의식은 최종 근거나 이유라기보다는 오히려 비인칭적 마음이 타자와 소통해서 발생시킨 흔적이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p. 160)

 

Ü 융은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장자가 이야기한 유한한 고착된 자의식인 내적 사건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일까?

 

융의 체험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돌이라고 생각하자 갈등은 멈췄다. 돌은 불확실한 것도 없고 자기를 알려서 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돌은 영원하며 수천 년 동안 살아 있다. 나는 생각을 이어갔다. 이에 반해 나 자신은 단지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급히 타올랐다가 꺼지는 불꽃처럼 가능한 온갖 종류의 감정에 불살라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내 감정들의 집합이었으며 내 안의 다른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돌이었다.’

 

이로써 자의식을 의식하는 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은 실마리를 잡아간다.

 

나의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인식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삶으로 한계가 없는 인식을 따른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인식을 추구한다면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다.(p. 161)

 

Ü 그래서 장자는 이야기 한다. ‘인식이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 그치는 것이 지극한 것이다.’

 

□ 장자에 따르면 이렇게 자신의 유한성을 은폐하고 아울러 이런 유한성에 근거해서 모든 타자를 미리 규정하는 것이 사변적 인식이다.

 

결국, 인식이 무한해 보이는 것은 단지 관념적으로만 그럴 뿐,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타자를 규정하는 나의 인식은 항상 나의 자의식의 동일성에 최종적으로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식을 통해서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앎을 확보할 수 없다고 본다. 유한하고 제약된 존재인 인간이 이런 유한성을 넘어서는 일체의 외부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장자는 말하고 있다. (p. 163)

 

Ü 어째 보면 칸트와 닮아 있다. 이성의 한계만큼만 인간은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인가. 융은 무한과 유한의 관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재인용한다.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단일성과 무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 무한성이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 개념이라면 유한성은 기본적으로 외부성 externality 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개념이다. 장자가 삶의 유한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루어진 몸을 한 번 받으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항상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타자와 부딪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데 그런 갈등의 모습은 마치 말을 모는 것처럼 격렬해서,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하는구나.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성공을 보지 못한 채 평생 동안 고생만 하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모른 채 수고스럽게 자신을 소모시키는구나! 어찌 애달프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우리는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몸이 변하면 그에 따라 마음도 변하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커다란 슬픔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삶은 실제로 이처럼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면 나만 어리석고 어리석지 않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 (p. 164)

 

Ü 앞서 인용한 융의 유한성, 무한성의 대한 삶에 의미와 비교해보니 매우 재미있다.

 

□ 타자와의 충돌과 상호파괴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자신이 이루려던 것에 집착하면서 우리는 충돌과 파괴의 삶을 강화시켜 나간다. 결국 삶은 지치고 피곤하지만 자신이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강박적으로 음악을 생산해야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피리가 자신의 비어 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는 편안히 쉴 것인가? 장자는 갈등과 투쟁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라고 본다. 삶 자체가 원래 이렇게 저주받은 것인가? 우리는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p. 165)

 

Ü 각주) 양주는 말한다. 온전한 삶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이 둘째이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압박받는 삶이 제일 못하다.

 

□ 인간 삶의 유한성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첫째, 타자와의 충돌 둘째, 나 자신의 육체의 소멸, 즉 죽음의 도래다.

 

□ 우리는 병이 들거나 늙게 되면 혹은 형을 받아 수족이 절단되면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집착하고 번뇌한다. 그러나 만약 마음이 그런 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p. 166)

 

□ 장자에 따르면 인식의 사변적 무한성이 지닌 문제는 그것이 삶이 지닌 근본적 유한성(=타자와의 충돌, 죽음의 문제)을 망각시키는 데 있다. (p. 167)

 

□ 인식의 무한성에 대한 두가지 거대 담론

첫째 : 세계의 기원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다.’ (P. 168)

 

Ü 장자는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 Potential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그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작의 시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결국 무한소급으로 귀결되는 이 무한반복의 사유 앞에 장자도 무력했을 터. ‘에서 철학자 김용규는 이에 대해 말한다.

 

퍼텐셜은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 존재의 장은 퍼텐셜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퍼텐셜을 무조건 초월하고 우주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우주를 무한히 초월합니다. 이는 마치 신의 크기가 모든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이 모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중우주모형에 따르면 퍼텐셜은 약 10 500승개로 추정되는 진공상태를 포함하는데 각각의 진공 상태가 모두 빅뱅을 통해 하나의 우주로 발전한다. 이 같은 우주들의 팽창은 마치 바다에서 물방울이 생겼다가 사라지듯이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 과정일 수 있습니다.’

 

또한 캠벨은 이와 같은 것을 존재 너머의 일로 규정하고 있다.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 만약 세계의 기원을 있음이나 없음으로 확정하려는 노력도 이와 마찬가지의 무한소급에 빠져든다고 장자는 지적한다. (p. 169)

 

□ 둘째 : 세계의 통일성

 

천하에서 가을 짐승 터럭 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태산을 작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살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팽조를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고 만물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나아가지 마라, 결국 우리는 구체적 사태에 따라야 한다.’ (p. 169~170)

 

Ü 나아가지 마라, 결국 우리는 구체적 사태에 따라야 한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다. 그런데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p. 173)

 

Ü 장자의 이 text에 성심을 설명한다.

 

□ 월의 구체적 삶의 문맥을 마치 송의 구체적 삶의 문맥의 연장인 것처럼 사유하였기에 월이라는 삶의 문맥으로 장사하러 갈 수 있었다. 이런 성심을 통해 구성된 월은 이 인물에게는 송에 다름 아니었다. 결국 이 사람은 송을 통해 월을 외삽 extrapolation 하고 있을 뿐이다. (p. 174)

 

우리의 몸은 이미 새로운 삶의 문맥에 진입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착된 자의식은 이런 새로운 삶의 문맥의 도래가 주는 자명한 긴장을 미봉하려 한다. (p. 176)

 

□ 기존의 삶의 문맥과 도래한 삶의 문맥이 마주치는 그 경계선상에서 그 부득이의 분위기 속에서 인식은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p. 182)

 

Ü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생각이 탄생한다.

 

(각주) 갓 태어난 아이는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는 구성된 마음이 없기에 인식이 허구적으로 정립할 내면의식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이상적 모습을 아이의 마음으로 비유하면서 강조하는 것도 이들 어린아이가 새로운 삶의 문맥에서 타자와 잘 소통한다는 자연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p. 182)

 

미리라는 말은 구체적인 소통의 사태 이전이라는 의미이자, 동시에 연역적으로 미래에 적용될 것임(외삽, extrapolatio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자와의 구체적인 조우가 없이도 언어와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사변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에 대해 미리 염려하고 어떤 사태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 미리 단정하는 일체의 이 미리작동하는 사변이 장자의 해체의 대상이 된다. (p. 183)

 

Ü 기가 막힌 분석이다. 타자성에 세련되지 못함에도 우리는 예기를 한다.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타자성의 세련되지 못함의 절정이다. 아무런 장치 없이 미래를 두려움과 걱정으로 보려 하기 때문이다.

 

□ 언어를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타자를 규정하는 것은 특정 공동체의 의미체계나 그것이 내면화되어 이루어진 고착된 자의식의 드러남이나 적용이라는 점에서 꿈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p. 190)

 

□ 장자 text

말하기는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기에는 말하려는 것(=의미)이 있다. 말하기의 의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재로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 인 가? 아니면 만일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하기는 무엇에 의해 가리어져 옳고 그름의 판단이 있게 되는가? 어떤 말을 하든 말하기 자체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말하기는 화려한 수사들에 가려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가와 묵가의 시비 판단의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p. 190)

 

□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 이라는 장자의 진술은 무척 중요하다. 지금 장자는 언어를 숙고하기 위해 타자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전달하려는 의도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말과 의미 사이에는 확정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말을 듣는 상대방의 지위다. 다시 말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상대방이 말하는 사람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다. (p. 191)

 

Ü 각주) 동물과 조우할 때 인간 공동체를 확인, 미국문화와 조우할 때 한국문화를 확인, 결국 우리가 속한다고 자임하는 공동체는 항상 우리가 어떤 타자와 조우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 인간의 말은 새 소리와 구별되지만 그 이유는 새 소리가 그 자체로 쓰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는 무관한 쓰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말은 새 소리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말과 새 소리는 모두 각각의 삶의 문맥에서 쓰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 193)

 

Ü 쓰임의 문맥으로 살펴본 소통의 언어학

 

□ 자신들의 주장은 자신들에게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남에게도 자명한 진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가와 묵가의 담론은 타자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 194)

 

Ü 고착된 자의식, 새의 방식으로 새를 길들여야 하지 않는가. 자신의 방법으로 타인을 길들이여 하면 되는가. 감 나라 배 나라 하지 말아야겠다.

 

□ 언어는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약되어지는 것이다. (p. 195)

 

Ü 우리는 그 제약을 극복해야 하는데 언어를 부정함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선이해와 자의식을 버리고 무대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함으로써 언어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다.

 

□ 내가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그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말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보건대 어짊과 의로움의 기준이나 옳고 그른 방향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내 어찌 그 분별을 알 수가 있겠는가? (p. 203)

 

□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대대 관계에 있으므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결코 그런 대대 논리를 넘어서 있는 즉 안다와 모른다 라는 언어 밖에 있는 대상을 통해서 안다와 모른다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p. 205)

 

□ 장자 text의 추론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 수밖에 없을 것일세.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놀지 않는가. 모장이나 서시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을 안다고 하겠는가? (p. 205)

 

Ü 객관적 인식이란 있을 수 없다. 나아가 절대적 옮음 또한 있을 수 없다.

 

꿈을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큰 깨어남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삶이 큰 꿈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버젓이 아는 체를 하여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지만 고루한 일이지요. 만년 뒤에 위대한 성인을 한 번 만나서 그 뜻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나 같은 일이다. (p. 207, 김학주 역 장자인용)

 

□ 자체 내의 논리로서 작동하는 언어를 매개로 수행되는 인식은 언어만큼이나 자체 내의 논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장자의 입장이다. 결국 이렇게 자기충족적인 체계 내에 갇혀서 외부로 나갈 수 없는 언어와 인식은 꿈과 같은 것이다. (p. 207)

 

Ü 인식, 언어, 고착된 자의식이 꿈에 불과한 이유다.

 

□ 이 삶의 세계 속에서만 언어, 인식, 고착된 자의식은 자신의 온전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p. 209)

 

□ 무엇보다도 자의식의 동일성을 해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삶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 210)

 

Ü 나의 두려움의 근저에는 삶과 죽음이 있었다.

 

□ 자의식의 동일성을 규정하는 내용 중 아마도 가장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판단은 나는 살아 있다라는 것일 것이다. (p. 211) 장자에 따르면 인식의 규정은 결코 인식된 사태와 필연적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다는 규정은 대대 논리에 의해 나는 죽지 않았다라는 규정을 함축하지만, 실제로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 규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p. 212)

 

생사관념은 고착된 자의식의 최후의 보루 (p. 213)

 

□ 장자 text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보였다. 안성자유는 그 앞에 시중들면서 서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탁자에 기대고 앉은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고 앉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자기가 말했다

 

현명하게 그것을 너는 질문하는구나. 자유야! 지금 나는 내 자신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p. 214)

 

Ü (본문) 고착된 자의식을 매개로 한 나만이 죽음을 두려워할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나를 살아 있는 나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고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모두 고착된 자의식의 기본적 규정성인 살아있는 나의 존재 문제와 필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 장자 text

 

그렇게 거대한 대지가, 나를 몸으로 싣고 삶을 통해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산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죽는다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p. 219)

 

지금 훌륭한 야금사가 쇠를 붓는다 합시다. 이 때, 쇠가 튀어 나오면서나는 반드시 막야의 명검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훌륭한 야금사는 상서롭지 않은 쇠라고 생각할 것이오. 지금 한 번 사람의 형체를 타고났다고 해서사람으로 살아야지, 사람으로 살아야지하고 말한다면 조물주는 반드시 상서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지금 한결같이 하늘과 땅을 큰 용광로라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야금사라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게 된들 안 될 곳이 있겠소? 깜빡 잠들었다가 문득 깨어날 따름이지요. (김학주 역, 장자 인용)

 

Ü (본문 설명) 생사 관념에서 벗어난 사람은 꿈과 같은 언어, 인식,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삼중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장자에 따르면 만약 이 생사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다시 다른 대대 관념의 포로에 빠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태도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p. 220)

 

□ 장자가 보았을 때 고착된 자의식의 최종적 규정은 살아있는 나.

 

의식적으로 정립된 삶은 그 이면에 의식적으로 정립된 죽음과 짝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집착의 근원이고 또 역으로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근원이다. 더군다나 죽음은 현재의 나 아닌 것으로 즉 타자적인 것으로 정립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타자에 대한 공포와 동외연적인 감정을 낳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 삶의 관계적 성격에 대한 무근거한 공포이고 따라서 삶에 대한 부정의식일 수밖에 없다. 모든 공포는 고착된 자의식, 혹은 삶에 대한 집착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런 집착은 부득이 라는 유한한 자신의 삶의 양식에 대한 부정의식을 함축하는 것이다. (p. 222)

 

Ü 공포는 언어와 인식의 한계에 사로 잡힌 나로 인해 발생되는 꿈과 다름 없는 감정 상태다.

 

2. 깨어남 : 도추와 단독자의 발견

 

□ 언어와 인식은 기본적으로 대대 논리에 의해 작동하고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세계는 소와 소 아닌 것으로 모두 설명 가능하고 나아가 말과 말 아닌 것으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언어의 대대 논리를 따라 고착된 자의식을 통해 작동되는 인식은 허구적이고 관념적인 무한성을 낳게 된다.

 

Ü 따라서 장자는 언어와 인식은 꿈에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언어, 인식, 고착된 자의식은 구체적인 삶의 문맥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남곽자기가 살았으면서 동시에 죽은 것처럼 보인다는 안성자유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장자는 안성자유의 말을 빌려 남곽자기가 =삶 아님라는 무대(=대대 논리가 없음)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던 것이다.

 

무대의 공식으로서 a=-a 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 그래서 언어와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사유의 분별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p. 225)

 

Ü 대대의 논리 외에 자리한 분별 능력. 너와 나 사이에 공간을 무한의 공터로 남겨놓은 양행이 지배하는 공간을 우리는 무대의 공간이라 한다.

 

□ 장자 text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다.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지혜로써 판단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고 하는 것이다. (김학주 역, 장자 인용) (p. 226)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식이란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는 인칭적인 고착된 자의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가 대대의 능력을 상실하면 이것을 정립했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식도 자신의 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 227)

 

Ü 이 사유는 참으로 신기하다. 고착된 자의식을 해체하기 위해 옳고 그름을 해체하기 시작하면 질문과 질문 끝에 사유의 근원과 윤리의 해체로 다가선다. 옳고 그름은 무엇에 기반하는가? 왜 옳은가? 왜 그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기준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가? 그렇게 만들어진 윤리의 기준은 과연 온당한가?

 

□ 정확하게 그 물건을 돌아가는 물레의 중심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장자는 이런 마음의 상태를 원환의 중심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소용돌이나 태풍의 눈이 비어 있는 상태는 강렬한 소용돌이를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용돌이의 내부가 비어 있음은 외부의 강렬한 운동과 동시적인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장자가 권고하는 원환의 중심을 얻는 것, 혹은 빔이 일종의 정적주의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고요함이 역동성의 이면이라는 것, 비움이 타자와의 민감한 소통과 동시적 사태 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p. 229)

 

Ü ! 이거다! 장자 철학의 핵심이다!

 

□ 자신들만이 선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들, 그렇지만 이들과는 선호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완전함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다. (p. 234)

 

Ü 이럴 때 필요한 것으로 장자가 제시한 것이 因是의 개념이다.  일상적 삶에서 조우하는 타자와 가장 적절한 관계맺음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장자 text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이것이다라고 여기는 인식을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에 깃들도록 한다. 일상적인 것이란 씀을 말하고 씀이란 소통을 말한다. 그런데 소통이란 바로 (나와 타자가 마땅한 자리를) 얻음이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지극해진 것이다. 사태에 따라 긍정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고 한다. (p. 239~240)

 

Ü 깊다. 깊어

 

□ 겨울에 솜을 빨아도 손이 트지 않는 법을 산 후, 수전에 이용해서 승리를 얻은 이야기. 실제적인 삶의 세계는 이렇게 고정된 목적이나 의미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런 고정된 의미가 해체되고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세계. 이런 삶의 세계 속에서 자유로운 소통은 나와 타자를 그 삶에 맞게 자리를 잡게 해준다. 다시 말해 소통 속에서 나는 타자에 어울리는 임시적 자의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p. 242)

 

□ 육지에서의 행동 규칙을 버린다는 것이 무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물에 뛰어드는 것은 바로 인시하는 소통의 행위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제 물과 소통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이 사람은 경이로움을 가지고 어떻게 자신이 물과 소통할 수 있었는지 모르면서도 그렇게 되었다. 고 술회하게 될 것이다. 장자는 이런 소통에 대한 사후적 기술도 도라고 말한다. (p. 245)

 

Ü 도가 트였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자신이 재단할 수 없는 경지다.

 

□ 장자의 도는 미리 설정된 본질로의 복귀이거나 사전에 미리 결정되어 있는 목적의 실현일 수는 없다. 그것은 새로운 타자와의 조우를 통한 소통과 그 소통의 새로움에 그 참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장자는 도를 구체적 사태에 따르게 되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p. 247)

 

□ 무대의 마음을 회복한 사람은 오히려 무한히 많은 타자가 우글거리는 삶의 세계로 내던져진다. 문제는 이 많은 타자들이 여전히 언어, 인식, 고차된 자의식의 감옥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데 있다. 결국 달자는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다. 이제 그는 언어에 지배되기보다 이제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된 것이다. (p. 248)

 

□ 유동적인 물이 있다고 하자. 이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드러나고 세모난 그릇에 담기면 세모나게 드러난다. 여기서 유동적인 물 자체가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무대의 마음을 상징한다면 상이한 그릇을 만나서 규정할 수 있는 모양을 띄는 세모난 물과 네모난 물 등은 임시적 자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세모난 그릇에 담긴 물이 얼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릇으로부터 이 세모난 얼음을 빼내어도 이 얼음은 세모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세모난 얼음은 고착된 자의식을 상징한다. (p. 252)

 

Ü 그래서 어디에도 받아들여질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파괴적 성정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 장자의 지적은 정확하다.

 

□ 여기서 원숭이들은 시비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과 희노라는 감정적인 작용을 하는 유대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결국 조삼모사 이야기는 무대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유대의 마음을 가진 자들과 소통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다. (p. 253)

 

Ü 합목적적 상황 인간, 장자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철학을 펼쳤다면 아마 대단한 재상이 되었거나 일찍 절명하였거나 하지 않았겠는가.

 

□ 장자에 따르면 무대의 마음은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은 듯이 중심에 있지만 일체의 타자에 대응할 수 있다. (p. 256)

 

Ü 부동의 중심을 이루는 태풍의 눈은 강력한 힘을 위한 진공상태다. 대체 그 경지는 어떤 경지인가

 

□ 싫든 좋든 타자는 나의 삶에 폭력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p. 262)

 

□ 장자는 소통과 도가 망각되는 이유는 바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변적 인식의 대두 때문이라고 진단한 것 (p. 265)

 

□ 장자 text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 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고 무엇을 가지고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완성으로 가리어지고 말하기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진다.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지고 외물들을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p. 266)

 

Ü

 

길은 걸어가는데서 완성된다 道行之而成 는 구절은 구체적 사태에 따를 뿐이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태를 도라고 한다는 구절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은유라고 할 수 있다. (p. 268)

 

□ 공동체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언어 사용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언어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 (p. 270)

 

Ü 장자의 철학은 탁월하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발 딛고 선 이 땅에서부터 들려오는 질문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품어낸다. 그래서 존재니 우주니 의식이니 하지 않는다.

 

□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과 대대 논리로 매개되어 있는 '대칭적인 대상'은 거부되지만 삶에서 조우할 수밖에 없는 '비대칭적인 타자'는 소통의 짝으로 긍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p. 275)

 

무대의 마음을 지닌 자는 자신이 조우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의 마음을 지닌 자는 자신이 조우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 미리 인식을 하려고 한다. 무대의 마음을 가진 자의 인식은 자신이 실제로 조우하고 있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우리의 앎은 알지 못하는 것에서는 그쳐야 한다. 고 말했던 것이다.

무대의 마음은 일체의 대대 논리가 지워진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비어있는 주체, 비인칭적인 주체 혹은 유동적인 소통주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이제 주체에게 타자가 들어와서 쉴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양론적 공간과 삶의 공간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이다. (p. 276)

 

Ü 양행의 실천적 함축이다. 산을 오르는 일에 빗대어 보자 오른다는 것을 유지한 채 오르며 만나는 각각의 홀드와 스탠스, 그리고 크랙에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는 것은 유동적이고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타자의 타자성에 맞게 자신을 조절하려는 노력이자 결단이다

 

□ 저는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 (p. 278)

 

쓸모 있음이 좋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쓸모 없음도 쓰임이 있다는 논리로 비판을 가하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죽음이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 논리로 비판을 가하고 인의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소통원리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이 원리를 잊어야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좌망의 논리를 통해 비판을 가한다. (p. 279)

 

Ü 체계적인 빈틈 없어 보이는 철학적 완벽성을 추구하였구나.

 

□ 장자 text

 

맹손 씨는 살게 된 까닭도 알지 못하고 죽게 되는 까닭도 알지 못하였다. 먼저 태어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뒤에 죽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연의 변화를 따라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는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릴 따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살아서 변화하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알겠는가? 변화하지 않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한 뒤를 알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나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자들이 아닐까? (p. 282)

 

□ 장자가 부정하고 있는 것은 생사라는 관념의 매개를 통해 죽음과 허구적이고 관념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은 즐겁고, 죽음은 슬프다 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대대 논리에 종속되는 삶의 태도다. 생사라는 대대 관념이 실제로 일어나는 생사라는 자연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 단지 이것은 폐쇄적인 인식과 고착된 자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p. 285)

 

□ 양행, 장자의 논의에 따르면 무대의 마음과 유대의 마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 1. 전자가 나는 나 라는 인칭성이 제거되어 있다면 후자는 이런 인칭성에 따라 작동하는 마음이다. 2. 전자가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으로 도래하는 타자에 맞게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다면 후자는 나라는 인칭적으로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타자를 삶의 짝이 아니라 사변적인 관조나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p. 286)

 

□ 우리는 장자의 견독의 방법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는 모든 진리를 회의한다. 그 회의는 수학적 진리에까지 이를 정도로 투철한 것이다. 방법적 회의의 끝에 남았던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 cogito . 장자의 단독자와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장자의 단독자는 코기토마저 해체해야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p. 290)

 

Ü 이 부분은 사전 지식이 없어 난해하다. 이럴 때도 장자적 사유를 받들어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 할까. 어쨌든 코기토와 단독자의 차이점은 현재로선 정확하지 않다.

 

□ 내면이 다름 아닌 고착된 자의식이라면 그리고 이 고착된 자의식이 과거의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식들 통해 정립된 내면과 외면 모두는 삶이 처한 현실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과거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p. 291)

 

3장, 삶 : 타자와의 소통과 유한한 자유

 

□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그 죽고 사는 운명에 낮과 밤과 같은 항상성을 가진 것을 자연이라고 한다. 인간으로서는 관여할 수 없는 것이 모두 사물의 참모습이다.

 

죽음은 그저 우리 유한한 인간의 숙명이자 한계일 뿐이다. 죽음은 실체화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p. 300)

 

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죽음은 그저 삶이 계속되다 마는 어느 지점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

 

□ 선표는 그의 속마음을 길렀으나 그의 외형을 호랑이가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외부의 사귐을 잘하였으나 그의 안에서 병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그 중 뒤지는 놈에 채찍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p. 302)

 

Ü (본문 설명) 무대의 마음을 회복한 선표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어 이 나를 기르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의 유한성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유한성을 외적이고 물질적인 수단을 통해 보충하려고 한 장의가 끝내 마음의 안정을 해쳐서 이 나를 기르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의 마음이 지닌 소통의 잠재적 무한성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양행의 지혜를 떠올릴 수 있다. (p. 303) 장자는 진정한 고수,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그 안에서 미리 해 두었다.

 

충효, 라는 관념이 이렇게 현실적 물리력을 지니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판단과 행동을 지배하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p. 309)

 

Ü 그리하여 배격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이래서 양행의 도가 필요하구나.

 

□ 자신이 비어졌을 때, 타자는 내게 타자성을 가진 것으로 들어온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타자의 타자성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부여한 본질을 제거했을 때에만 드러난다.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삶의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p. 312)

 

Ü 타자와 자신 앞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상태, 가령 가방이라는 사물앞에 그 용도나 형태, 색깔이 나와 가방 사이에 있지 않는 상태. 그때 나는 가방과 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 몸과 마음은 삶에서 통일되고 따라서 삶이 지닌 유한성과 무한성의 두 계기다.

 

내가 타자의 타자성과 조우해서 자신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자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에 기대어 자신의 마음을 기른다.는 표현으로 의미했던 것이다. 결국, 마음은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만 존립한다는 것, 따라서 나의 유한성을 넘어서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계기라는 것이다. (p. 317)

 

Ü 갈수록 감탄이다.

 

□ 장자 text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 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p. 318)

 

두께 없음이 무대의 마음을 비유한다면 틈 있음은 타자에 나와의 소통 가능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두께 없음으로 틈이 있음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무대의 마음으로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322)

 

□ 타자와 잘 소통하기 위해서 장자는 인간의 삶이 처한 유한성의 문제는 이렇게 마음의 무한성의 회복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p. 324)

 

Ü 갈수록 융과 유사하다. 타자는 타인을 의미하지만은 않을 것.

 

□ 장자 text

 

너는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앎으로 안다는 것을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 안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p. 327)

 

Ü (본문 설명) 감관으로 타자의 소리를 듣지 말고 이어서 마음으로 타자자의 소리를 듣지 말고 기로 타자의 소리를 들으라 聽之以氣 p. 328)

 

□ 심재란 유대의 마음이 변형되어 거울과 같이 맑은 무대의 마음이 드러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기 혹은 신은 이런 무대의 마음이 무한한 타자에 대응할 수 있는 소통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p. 330)

 

□ 목숨을 건 비약 salto mortale (p. 333)

 

Ü 키에르케고르.

 

□ 무대의 마음이 수양론적 공간에서 존립하는 반면 타자와의 소통은 삶의 공간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 양자 사이의 불연속성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p. 335)

 

Ü 그러고 보니 원효는 진정한 대가였다. 양행의 실천가다.

 

춘원 이광수의 원효

‘원효는 신라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이오 고승이오 성승이다. 그의 대승기신론소와 화엄경소는 불교가 전하는 동안 전할 것이다. 원효는 세계적 위인이다. 그러나 원효는 요석공주로 하여 파계하야 설총을 낳았다. 그는 어찌하여서 파계를 하였던가. 성승의 파계 그것은 큰 사건이다. 오늘날까지 해답 못 된 문제다. 인성의 근저에 관련된 문제다. 나는 이 (중략) 인간으로서의 고로와 성자로서의 수행을 그려보고 싶다.’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의 동일성을 비우고 마음이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비인칭적이고 따라서 유동적인 무대의 마음을 회복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랬을 때 주체는 매개로 환원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진정한 소통을 이루게 된다. (p. 336)

 

Ü 무대의 마음은 비인칭적 유동성의 상태, 즉 주체화되기 이전의 비인칭성의 상태에 있다. (저자)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고 한다면 어떨까? 혹은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떨까? 거울은 타자를 항상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 - 내적이며 동시에 타자 - 관계적임을 상징하고 있다.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도 어떤 것도 비출 수 없는 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절대적인 있음은 절대적인 없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장자는 타자와 잘 소통해서 새로운 삶의 문맥을 잘 비추어내려는 데 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겠다는 혹은 같은 말이지만 모든 것을 비추겠다는 거울(=초월적 마음)과 어떤 것만을 비추겠다는 거울 (=성심을 스승삼는 마음)은 모두 비본래적인 거울일 뿐이다. (p. 340~341)

 

Ü 장자 철학의 핵심이지 않겠나.

 

□ 장자 text

 

사람은 누구나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고요한 물을 거울로 삼는다. 단지 고요한 것만이 고요해지려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p. 343)

 

Ü 다리 잘린 왕태 이야기

(본문 설명)사람들은 물에서 자신을 비추지 않고 고요한 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자신의 모습을 상심을 가진 사람에게 비추어본다는 것은 결국 상심을 가진 사람을 계기로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344)

 

□ 결국, 왕태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외적인 가치나 매개에 의해 평가되고 재단되어야 하는 죄인으로 보지 않고 스스로를 다른 무엇과도 환원불가능한 단독적인 삶의 주체로 긍정하게 된다. (p. 345)

 

Ü 이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궁극으로 이루어야 할 인간 model을 제시한다. 나는 생각한다. 나를 보고, 나를 깊이 만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마음을 가지게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

 

□ 장자는 무한하고 복수적인 삶의 타자들과 즐거움을 확보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따라서 관념적 매개를 미리 설정해서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반면, 어린아이는 어떤 물건과 만나도 바로 직접적으로 그것과 즐겁게 놀이를 시작한다. 해변에서 어린아이가 자신을 잊고 하루 종일 모래성을 쌓고 바닷물이 또 허물면 다시 쌓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장자는 지금 타자와의 조우와 소통도 미리 설정된 목적이나 관념이 없이 즐겁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p. 348)

 

Ü 김영하가 ted에 나와 설명한 대목이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다. 오늘날 직장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다.

 

특정한 상만을 드러내는 거울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듯이 자기동일적으로 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 법이다. (p. 352)

 

Ü 그리하여 장자는 양행의 수행이 필요하다 했다.

 

□ 장자 text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아지랑이나 먼지는 생물의 숨결에도 날린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것이 본래의 빛일까? 그것이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일 것이다.

 

매미와 작은 새가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펄쩍 날아 느릅나무 가지에 올라가 머문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9만 리나 높이 올라 남극까지 가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한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적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한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Ü

 

대붕이 날아가기 위해서도 이런 거대한 바람이 조건으로 구비되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결코 정신적 자유의 비유일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고로움과 고생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유대의 마음을 각고의 노력으로 해체하지 않으면 무대의 마음은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롭다고 관념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자유는 언젠가는 여지없이 타자와의 충돌과 죽음의 도래로 흔들릴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타자와의 충돌과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p. 362)

 

Ü 자유, 무엇인가? 나를 버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자유를 남의 집 개이름 처럼 떠들고 다녔다. 부끄럽다. 이제서야.

 

□ 무대의 마음을 가진 자, 천지의 올바름을 타고 여섯 기운의 변화를 부리면서 무한한 타자와 노니는 사람 (p. 365)

 

□ 결국, 장자가 말하는 무대의 마음이란 사변적인 절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조우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조건을 의미한다.

 

결국,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무대의 마음은 자유의 가능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조건은 오직 삶에서 조우하는 타자와의 소통으로서만 현실화된다. (p. 366)

 

Ü 타자에 의한 제 자신의 자유, 이거 굉장히 매력적이다. 우리가 이제껏 생각했던 자유, 구름이 하늘거리고 끝없는 초원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달려가는 것을 상상했던 자유라는 개념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 자리에 다시 장자의 자유 개념이 건축된다.

 

□ 개념적으로 자유는 자유는 자기로부터 말미암는다. 自由, 외적인 강제가 없이 철저하게 자기원인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을 의미한다. 일체의 외적 조건 없이 절대적 자발성에 근거하는 자기원인적이라는 자유의 관념은 사변적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소통과 그것을 위한 수양을 강조하는 장자에게 있어 절대적 자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면 소통과 그것을 위한 수양은 불필요한 개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육체적 유한성과 독립된 실체로 사유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 자유의 이념은 유한한 자유를 추상화하는 데서 존립하는 개념에 지나지 않음이 밝혀진다. (p. 367~368)

 

Ü 그랬다. 자유란 북극성의 위치처럼 멀다. 그러나 우리는 추구한다. 추구해선 안 되는가?

 

□ 타자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는 자신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와 동시적인 사태다.

 

인간들은 새로운 타자와 조우했을 때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던 부자유다. 장자에 따르면 인간의 부자유는 이처럼 추상화된 본질과 규정, 즉 매개 일반에 대한 노예 상태에 다름 아니다.

 

장자가 생각하던 자유는 심미적인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원인적이고 자발적인 절대적인 자유일 수는 없다. 오히려 장자가 생각하고 있던 자유는 대상이나 주체를 미리 규정하지 않는 즉, 무매개적인 무대의 마음에서 존립하는 타자와의 새로운 소통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었다. 결론적으로 길은 우리가 걸어가야 생긴다.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 날개가 없는 데도 난다 以無翼飛(이무익비) 는 주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p. 370~371)  

 

Ü 자유를 부정한 자유, ..

 

결론

 

□ 전국시대라는 정치적 상황과 제자백가로 상징되는 사상적 상황의 산물, 다시 말해 대화와 소통의 결여 속에서 그의 철학은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표면적으로 다양한 국가들과 다양한 사상들이 유행했던 시대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유아론자들만이 존속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는 전정으로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유아론적 꿈으로부터 깨어나야만 한다. (p. 375)

 

Ü 한 차원 높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는 절대적 위치에 설 수 없다. 결국 거울의 밝음의 능력 그 자체는 오직 다양한 타자를 비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확인될 수밖에 없다. (p. 376)

 

Ü 객관적이라는 말은 신의 존재론만큼이나 확신할 수 없는 말이다.

 

□ 비인칭적인 마음 상태는 사유나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이나 희로애락의 정서적 교감과 같은 인칭적 수준에서의 작용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적인 작용이나 정서적인 작용은 모두 선이해나 선감정을 전제로 해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 377)

 

나 아닌 것으로서 타자들은 기본적으로 무한히 다양하고 복수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장자가 권고하는 자유의 현실성이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p. 379)

 

Ü 시작은 나를 버리는 작업, 열반으로 들어서는 관념적이고 불교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로지 잘 살기 위한 그래서 타자와 같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작업. 그것이 자유로 가는 길.

 

우리는 언어, 인식, 그리고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세 종의 매개를 통해서 미리 규정된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부터 일체의 매개 없이 삶의 차원에서 직접적인 소통을 도모해야만 하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로 이행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타자와 소통하려는 목숨을 건 비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장자가 바로 날개 없이 날 수 있어야 한다. 以無翼飛(이무익비) 고 혹은 알지 못함으로 알아야 한다 以無知知(이무지지)고 말했을 때 의도 했던 것이다. (p. 380)

 

Ü 핵심이다.

 

□ 장자 철학의 최종적 이념은 심재, 좌망, 견독, 이라는 내향적 실천론도 이 이념에 종사하고 포정해우나 인시라는 외향적 실천론도 이 이념에 종사하는 것. (p. 381)

 

□ 장자 철학은 역사성을 부정하는 데서 존립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역사성은 단지 유대의 마음에서만 존립되는 비본래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의 마음이 제거된 무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성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지닌 기억능력에 의존한다. 그런데 타자와 소통하지만 그 흔적은 저장하지 않는다.는 이념은 인간의 기억역량을 부정하는 데서 존립하는 것이다. (p. 384)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념은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가 공존하는 지점이다. 기존의 매개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을 오직 주체 자신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이 이념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타자의 폭력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또 기존의 매개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매개 구성의 논리에까지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 이념은 역사성과 사회성에 대해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든 문제를 주체와 타자 사이의 소통의 문제로 나아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오로지 나의 마음으로 문제로 환원시켰기 때문에 귀결되는 문제점들이다. 사회의 갈등을 과연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정당할 수 있는가?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체와 타자사이의 갈등을 전적으로 주체의 마음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정당할 수 있는가? 결국 장자철학은 매개 제거를 위한 수양론과 조우한 타자와의 생생한 소통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p. 385)

 

 

3. ‘여전히 꿈 속(내가 저자라면)

책을 씹어가며 읽었다. 장자 text를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자 장자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장자를 접근했다고 전해지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인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장자를 읽고 난 후 이제껏 읽었던 모든 고전들이 다시 엎어지는 것을 경험하고는 나는 앞으로 장자를 멀리하거나 아니면 장자를 발본색원하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제 이 책을 읽고 장자를 난도질 해보겠다는 욕망이 우세함을 알았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멀다. 내 마음의 자유만큼이나 멀고 저 멀리 북극성만큼이나 아득하다. 잘못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간다.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겠는가. 어짜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장자를 씹어대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저자의 장자 생각은 탁월하다. 장자를 이만큼 해부학적 견해를 가지고 접근한 이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철학으로 샤워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저자 강신주의 말이 어렵지 않게 와닿았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 자신이 장자적 단독자’, 좌망, 견독, 무매개적 소통의 인간으로 이행하는 데 대단히 맞지 않고 유아적인 수준임을 알고 난 다음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의기소침을 가져다 주었다. 나를 주눅들게 했다. 아직 나약한 인간으로 한 발짝도 앞서가지 못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어린 아이만큼도 안 되는 유아적 사유로 이제껏 떠벌리고 다닌 내 자신을 가엾게 여기게 했다. 아 쪽팔려, 내가 자유를 이야기하고 다녔다니!

 

언젠가 내 자신이 올바른 사람으로 다시 서게 되는 지점까지 이 책을 덮어 두었다가 다시 꺼내 읽어 볼 생각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끊임 없는 자기 검열이 나를 채찍질 했는지를 알게 해 주는 지표text로 손색없다.

 

장자text를 읽고 난 다음의 사견.

 

장자를 읽었지만 삶은 암전이 되었다. 이제껏 많은 고전을 접하며 생에 대하여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장자를 읽고 난 후 삶은 다시 어둠으로 휩싸였다. 장자는 의로움과 어짊을 땅에 패대기 친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에 적극 동조하였다. 자유로운 사람, 구애 받지 않는 인간의 덕목은 덕목이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현실 회피의 비난과 의도적 비켜가기 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장자를 깊이 읽어 본 다음이라면 이 사람, 장주는 현실에 정면돌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나오는 곤이라는 큰 물고기와 붕새라는 거대한 새는 사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여 독자의 시선을 흐린 뒤 지금까지의 의도된 모든 사상과 인간을 억압하고 있던 덕목들을 뒤엎는다. 현실 전복을 우회하지만 사회 시스템 변혁을 정확히 돌아가지 않고 직설한다.

 

그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고는 인간은 자연을 닮아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한다. 그는 부에 대하여 지극히 적대적이었으며 아울러 권력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멀리하였다. 죽음을 축제로 전환하고 태어남에 냉정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목석의 시선을 유지한다. 구만리 장공에서 바라보면 나비와 자신은 둘이 아니라 모두 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1편 소요유에서 33편 천하 편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의문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장자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 반드시 물어야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총 망라 되어 있다. 이 질문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는 것이다. 질문 없는 삶이 곧 어두운 삶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유한의 인간, 피와 살이 있는 유한의 인간 앞에서 질문의 힘은 막강하다. 높은 차원의 질문이 거듭되면 신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자는 자기가 늘려놓은 질문에 자신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인간이기에 자기가 설정해 놓은 지인, 천인, 신인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억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인간, 만유는 단 한발자국이라도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또 다른 존재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몸은 비록 그리 될 지라도 장자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가 하늘 높이 구만리 장공을 떠돌고 다시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의 추악함을 끄집어 낼 만큼 빠져든다. 마이크로와 매크로를 넘나드는 그의 시선은 이미 인간의 시선을 넘어 섰다. 나는 그의 시선이 부럽고 그의 시선을 따르고 싶다.

 

원문에 대한 번역은 탁월하다. 원문에 대한 해석은 참조할 뿐, 애써 담으려 하지는 않았다. 내 시선과 장자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서 늘 자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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