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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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인도 께랄라주에 위치한 티루바난타푸람이란 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인천 공항에서 26시간이나 날아왔지요. 만 하루가 넘는 긴 시간을 건너 이곳에 도착했지만 인도 남부의 작은 도시인 이곳과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그곳 사이에는 그보다 훨씬 큰 시간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인도를 두고 '백년이 공존하는 나라'라고 했다는 군요. 도착한지 이제 겨우 1주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알 것도 같습니다.
이곳, 티루바난타푸람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사람을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달려오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 잠시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은 있지만 그야말로 그때뿐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지하철 환승 통토를 지날 때마다 달리듯 걷던 제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삼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온순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방법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그들은 미친 듯이 차를 몰아댑니다.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리고 차선을 넘나들고 추월합니다. 한국에서라면 평생에 한두 번 경험할법한 위험천만한 순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게 됩니다. 혹시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었던 문명의 이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호텔방에서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면 다양한 색과 모양의 지붕을 가진 판잣집들이 보입니다. 고급 비즈니스 호텔 바로 옆에 자리잡은 수많은 판잣집들이 어쩌면 오늘날 인도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뻔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서 비싼 밥을 먹고 있노라면 속이 거북해집니다. 함부로 그들을 동정해서는 안되겠지만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불편한 감정들을 외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제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호텔까지 걸어올 일이 생겼습니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판잣집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나는 걸음이 썩 내키지 않더군요. 솔직히 조금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악취가 풍기는 골목, 여기저기 펼쳐진 물웅덩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옹색한 옷차림의 사람들…… 하지만 착각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골목으로 접어든지 불과 열 발자국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듯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벌개진 얼굴을 감춘 채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래요. 행복한 가정을 위해 꼭 좋은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사진 한 장 보여드릴게요. 이상한(?) 점을 찾아보세요.
찾으셨나요? 사이드 미러가 없지요? 이곳에는 한쪽에만 사이드 미러가 달린 차들이 제법 있습니다. 부러지거나 떨어진 게 아니라 그렇게 출고가 된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운전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네요.
늘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자유 시간이 생기면',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말이죠. 행복을 위한 필요 조건 따위는 없다는 것을 사이드 미러가 하나뿐인 자동차를 보며 깨닫습니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위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만약 끝내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이 몹시 그리운 밤입니다.
(인도의 인터넷 사정으로 인해 편지가 많이 늦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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