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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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면 어떤 음식이 떠오르세요? 뭐니뭐니해도 카레지요? 인도에 도착하고 삼 일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했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맛이 괜찮았거든요. 하지만 삼 일을 넘기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땀구멍에서 카레향기가 밀려나오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엉뚱한 부분에서 터졌습니다. 닷새가 되던 날, 엉덩이 언저리에 신호가 온 겁니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었지만 직감적으로 딱! 알겠더군요. '치질'이었습니다. 독한 카레만 계속 먹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증상만큼은 분명했습니다.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한국에서라면 길모퉁이마다 있을 약국도 보이지 않았고, 사실 있다고 한들 쳐들어가 엉덩이 쪽에 벌어진 사태를 설명한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통증이라는 게 만만치가 않더군요. 정말 끔찍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감기라곤 모르고 살았는데 열이 오르기 시작한 겁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소화제와 아스피린을 몇 알 먹었는데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겁니다.
위아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밀려드는 아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이어지는 고객과의 회의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밤이면 호텔로 돌아와 밥도 못 먹고 침대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이후로는 처음 느껴보는 외로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앞으로 이 곳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치질'이라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문득 잠이 깨어 침대에 누워있노라니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치질의 현황을 눈으로 확인해보지도 못했으니까요. 손거울이라도 하나 있다면 어렵지 않게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작은 거울이 없었습니다. 한번 궁금해지니까 참을 수가 없더군요. 한참을 궁리한 끝에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호텔방 벽에 서 있는 커다란 거울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울은 그냥 두고 제가 조금 자세를 바꾸면 고통의 원인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실행에 들어갔지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문제의 정체를 확인한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치질'이 아니었던 거지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주먹만한 종기가 엉덩이에 생겼던 겁니다. 순식간에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비행기와 자동차 탑승, 거기에 마라톤 회의까지 겹치면서 엉덩이에 종기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종기가 워낙 크다 보니 염증이 생기면서 열이 났던 거고요. 전 그것도 모르고 엉뚱하게 소화제와 아스피린을 먹었던 거지요. 그제서야 저희 가족이 아스피린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도 떠오르더군요.
마음을 굳게 먹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습니다. 한참 동안 그 물에 몸을 담그고 감각이 무뎌질 때를 기다렸습니다.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는 두 눈 질끈 감았습니다. 그리고 터트렸습니다. 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삼켰습니다.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나쁜 기운이 몸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이 내렸습니다. 식욕도 돌아왔고요. 평화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종종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지요. 핵심은 그 상황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눈앞에 벌어진 현상에 집착하느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일에 소홀해지곤 하지요. 그리고는 현상을 다스리기 위한 즉흥적인 해결 방법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제가 소화제와 아스피린을 먹으며 종기를 치료하려 했던 것처럼 말이죠. 혹시 저와 비슷한 경험, 없으신가요?
치질의 누명을 쓴 종기 이야기를 마음 편지에 쓰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 고민, 또 고민했습니다. 하하~ 그래도 어디까지나 '마음을 나누는 편지'는 솔직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멀쩡한 엉덩이로 한국에서 맞이하는 월요일 아침이 황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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