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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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함께 사는 개, ‘산’과 ‘바다’와 더불어 지낸 지 일년 반이 넘었습니다. 처음 몇 달간 녀석들은 참 정신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툭하면 멀쩡한 신발을 물어 뜯어 신발 몇 개를 못쓰게 만들어 놓았고, 비싸게 마련해 놓은 거실 방충망을 홀랑 뜯어놓기도 했습니다. 멀리 산 아래로부터 손님이 올라오면 아주 요란스레 짓는 개 본연의 모습은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두 녀석은 별로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습니다. 손님이 와도 집 가까이 와야 비로소 짖고, 방문 손님도 주인의 기호를 구별하여 반기거나 경계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표정도 많이 변했습니다. 어릴 때는 귀여움을 받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늘 지나칠 만큼 애교와 아양을 떨었는데, 요즘은 오히려 멀뚱히 주인을 주시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마치 무심한 스님처럼 먼 곳의 풍경을 주시하거나 바람과 소리의 흐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무심해져 가는 그들 모습은 마치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고 이윽고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처음엔 조금 섭섭하더니 요즘은 오히려 대견하고 신비로운 느낌입니다. 나는 가끔 농담처럼 “이제 그 정도 밥을 얻어먹었으면 마당의 풀도 좀 뜯고, 아비 일할 때 필요한 연장도 척척 알아서 가져오기도 해봐라! 이눔들아!” 말하곤 합니다. 두 녀석이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곰곰이 곱씹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확실히 녀석들은 성장했습니다. 나는 녀석들의 성장이 잦은 침묵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을 잘 압니다. 모든 생명은 제 몸집을 키우는 과정에서는 요란하거나 현란함을 앞세웁니다. 여름 숲에 서서 고요히 숲 생명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본 이들이라면 그들의 생장 욕망이 요란스레 부딪히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을 숲에 서서 자주 침묵해 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스스로 침묵하여 그 고요함의 소리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성장이 바로 그 시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느꼈을 것입니다.
숲에서의 침묵은 자주 명상으로 이어집니다. 침묵하여 답답하거나, 침묵하여 고립과 단절로 빠져드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침묵함으로써 더 많은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되고, 오히려 침묵함으로써 나의 허위를 잘라내게 됩니다. 참된 침묵은 내가 뒤집어쓴 거짓을 잘라내는 과정입니다. 나의 거짓을 거둘 때, 타자의 거짓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생명은 내 순수한 영혼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거짓된 요란과 현란을 걷어냄으로써 성장에 이릅니다.
개가 침묵을 통해 어른이 되듯, 뱀이 허물을 벗어 새로운 시간을 만나듯, 나무가 낙엽을 만들어 나이테 한 켜를 완성하고 새롭게 시작하듯, 화려한 꽃들이 그 넘치는 에너지를 거두어 씨앗으로 여물듯, 거두어들이는 침묵의 시간을 통해 모두가 성장합니다. 그러고 보니 깊은 침묵 속에 젖어본 지 꽤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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