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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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뿌리풀의 꼴. 사진: 이영득, 풀꽃도감, 황소걸음
올해는 이 숲에도 무더위가 심해 열대야가 생기더니 이제는 국지성 호우가 밤잠을 깨우는 날이 많습니다. 요 며칠 새벽마다 퍼붓는 빗소리에 자주 잠을 깼습니다. 이른 아침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면 산방으로 닿는 길 여러 곳이 돌 뿌리를 드러낼 만큼 거칠게 파여나간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젯밤도 거센 빗물이 이곳으로 닿는 길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저 만큼 막대한 상흔을 남긴 물이 이 숲 골짜기를 떠났으니 틀림없이 마을을 휘도는 달천의 물 역시 세차게 흐를 것입니다.
오늘 그 송동다리를 건너보았습니다. 역시 물의 양이 많습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달천 바닥에 서식하는 달뿌리풀들은 너나 없이 큰 물의 흐름에 제 몸을 뉘고 있었습니다. 마치 개울바닥에 입맞추듯 일제히 물이 흐르는 방향을 향해 엎드려 있었습니다. 놀라운 모습입니다. 저 자리에 집이 있거나 산에 사는 나무가 있었다면 분명히 휩쓸려 떠내려 갔을 것인데, 한 길 높이도 되지 않는 가녀린 저 풀들은 여전히 개천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높은 수위가 잦아드는 날이 찾아오면 저들은 다시 몸을 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곧 가을이 시작될 테고 그 가을 깊어지면 저들의 꽃이 은빛 물결로 넘실댈 것입니다.
저들은 어떻게 시멘트 덩어리의 가옥이나 큰 나무도 넘어뜨리는 큰 물줄기에 맞서 자신의 삶을 지키고 제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나는 그 해답을 저들이 물이라는 고난을 맞아 돌파하는 전략 속에서 찾아 봅니다. 그 전략의 핵심을 나는 원칙을 지키는 삶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달뿌리풀이 세운 삶의 원칙 하나는 기는 뿌리로 개천의 돌과 이웃 달뿌리풀을 부둥켜 안으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수 천, 수만 포기의 달뿌리풀들이 서로를 껴안고 강바닥을 품으며 살아가면 어느 여름날 꼭 닥쳐오고야 마는 세차고 큰 물의 흐름과도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원칙 하나는 자신의 줄기 속을 비우고 뿌리 근처의 첫 마디에 유연성을 갖추며 사는 것입니다. 물의 저항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일제히 그 마디를 눕혀 물이 자신을 타고 넘게 합니다. 하지만 바람에게는 자신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 때는 비어 있는 속 줄기의 유연성과 빼곡히 연대하여 자라는 삶의 꼴로 넘어지지 않고 바람을 이기는 것입니다. 저들은 반드시 바람을 이기고 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센 바람을 이용해서 자신의 씨앗을 멀리 날려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피하고 바람엔 맞서는 것이 저들 삶의 원칙입니다. 물에는 유연하고 바람에는 강직할 수 있을 때 제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물을 맞아 지금 저들이 겪는 고난처럼, 우리에게도 불어나 세차게 흐르는 물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매미의 울음소리를 비롯해 밤의 고요를 흔드는 풀벌레 소리가 더 없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이미 가을이 여름을 대신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개천의 물 역시 곧 줄어들 것입니다. 뿌리를 지킨 달뿌리풀도 머지 않아 개천 바닥을 제 꽃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무엇엔가는 유연하고, 다른 무엇엔가는 강직할 수 있는 원칙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역시 그러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내게도 그런 원칙이 있습니다. 그대에게도 그런 원칙 하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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