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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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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일 00시 11분 등록

곡선의 힘

 

손님방 짓기의 내부마감을 끝내고 모처럼 벌통을 살폈습니다. 근 석 달 만에 주는 손길입니다. 바쁘고 게으른 농부 탓에 벌통은 이미 좁아터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덕분에 많아진 벌들은 그 무더운 여름 날을 벌통 밖의 벽에 붙어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벌통 속에 벌집을 가득 지었고, 꿀도 가득 박아두었지만 농부가 빈 벌집(계상)을 끼워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좁아진 집 밖의 벽에 붙어서 여름을 나야 했던 것입니다. 안타까워하면서도 집 짓는 일에 정신이 팔려 그들의 곤란을 도와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숲 도처에 결실의 시절이 임박한 것도 사실이지만, 9월의 숲 입구는 여전히 밀림입니다. 한 해 동안 마음껏 자란 풀들이 아직은 푸른 잎을 지키며 그 무성한 몸체를 받들고 있습니다. 집 가까운 곳에 놓은 벌통은 더러 그 입구의 풀을 뽑아 주어 벌들이 들락거리기에 불편함이 없었지만, 감나무 밭 한가운데 놓은 벌통과 버드나무 아래의 벌통들은 무성해진 풀에 파묻혀 육안으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벌통을 휘감은 풀과 덤불을 낫으로 걷어내고 한 통 한 통 마다 두 칸의 계상을 얹었습니다.

 

벌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제 집 짓느라 정신이 팔려 수만 마리 고마운 생명들의 거처는 방치해둔 게으름에 부끄러워졌습니다. 무성한 풀 섶을 낫으로 치우면서 과연 벌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 있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러잖아도 토종벌의 붕괴 현상이 이웃 마을에 까지 밀어닥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풀과 가시덤불 속에 버려진 나의 벌들이 남아있기나 할까?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계상은 벌들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만든 사각 기둥 모양의 빈 통입니다. 위와 아래가 뚫려 있어서 맨 아래 받침대 위에 넣어주면 벌들이 위부터 지어내려 온 벌집을 이어 짓는 공간입니다. 1개의 봉군은 많게는 8개의 계상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꿀을 박습니다.  계상을 넣기 위해 집 근처의 벌통을 들어올렸을 때 어떤 벌통은 대단히 묵직했고, 다른 어떤 벌통은 상대적으로 가벼웠습니다. 묵직한 벌통은 꿀이 많이 박혀 있는 것이고, 가벼운 벌통은 그렇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 근처의, 주변이 잘 정돈된 벌통들 보다 풀 더미 속에 버려진(?) 벌통들이 더 묵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습한 기후 조건에서 잘 발생하는 벌 기생 유충들의 개체 수도 풀 더미 속의 벌통들이 더 적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외 없이 그랬습니다.

 

언젠가 벌통 주변에서 자라는 풀이 말벌의 습격으로부터 꿀벌의 거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밀림처럼 우거진 풀 더미 속에 사는 꿀벌들이 더 강성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걸릴 것 없이 휙휙 날아다닐 수 있는 벌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습니다. 풀 더미를 요리조리 비켜가며 들락거려야 하는 벌들은 그 만큼 동선도 길고 에너지 소모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시기에 살림을 꾸린 벌들 중에 우거진 풀 속에 자리한 녀석들이 더 건강하고 많은 꿀을 모아두었다는 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곡선과 순환과 관계의 힘으로 수억 년 동안 번영해온 숲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생명들의 삶은 오로지 빠르고 곧게 뻗은 직선의 길을 통해서만 번영해 온 것이 아닙니다. 벌의 생존과 번영을 훼방할 것 같은 풀 더미와 가시덤불이 만들어낸 곡선 속에는 말벌 같은 외적의 침입을 억제하고, 미세하게 습도를 조절해주는 역할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곡선의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빠른 길, 직선의 길만을 길이라 부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IP *.20.20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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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2010.09.08 02:04:58 *.182.176.74
글을 읽고 나서...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살기,
한꺼번에 여러 개가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하기,
그래서 더 누리고 느끼고 바라보고 충실하기, 
이런 말들이 더불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숲속 강의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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