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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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창문을 두리는 소리에 밤새 뒤척이다가 눈을 떴습니다. 제일 먼저 든 떠오른 것은 초토화된 나라를 향한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아니라 당장 뚫고 가야 할 출근길 걱정이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니 아니나 다를까 길이 엉망입니다. 도로를 어지럽게 덮은 나뭇잎들과 여기저기 떨어진 간판의 잔해들이 지난 밤의 무시무시했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다른 교통 수단을 포기하고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자가용이나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타는 편이 제 시간에 출근하는데 유리할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된 탓입니다. 숨쉬기가 거북할 만큼 사람들이 많은 것도 괴로웠지만 더 큰 문제는 지하철이 느리게 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시간에 출근하기는 틀렸습니다. 이게 다 망할 놈의 태풍 탓입니다.
왕창 늦었으면 포기했을 텐데, 막상 지하철에서 내리고 보니 시간이 애매합니다. 허겁지겁 달려가면 얼추 지각을 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태풍이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름의 끝자락인지라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릅니다. 그냥 지각하고 말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팀으로 발령이 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마음이 급합니다.
온몸은 땀 범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 세차게 불어주는 바람 덕분에 속옷까지 젖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습니다. 사무실이 보이고, 지각은 면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여유로워졌는지 땀을 식혀주는 바람이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곧이어 스스로가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무를 부러뜨리고, 간판을 떨어뜨리고, 지하철을 느리게 가도록 만든 주인공도 이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람을 할퀴려고 부는 바람이 있겠습니까? 그저 더울 때 부는 바람은 고맙고, 추울 때 부는 바람은 밉지요.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일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면 추울 때 부는 바람 정도로 웃으며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난 토요일, 급히 인도에 왔습니다. 이곳 인터넷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하루 늦게 마음 편지를 보냅니다. 이해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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