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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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추억
그 날은 그리도 추웠다. 빙벽을 찾아 거친 사면을 오른다. 가파른 길, 달아오른 열기로도 몸은 데워지지 않았고 두꺼운 장갑에도 추위는 손을 파고 들었다. 납작 엎드린 풀은 메말랐고 그 풀을 얼음이 덮어 빛나지 않던 풀이 빛났다. 얼음에 박제되어 누렇고 작은 풀은 움직이지 못하였으나 얼음 안에서는 한 없이 편안해 보였다. 힘들어 거친 호흡을 토해내는 내 몸뚱아리를 생각하니 풀이 부러워 온다. 얼음 위로 들러 붙은 신설(新雪)은 제 닿는 모든 것들을 미끄러지게 했는데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오른 이유는 단지 청빙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나운 경사를 넘어, 마침내 크고 푸른 빙벽과 마주했을 때 속눈썹을 간질거리며 눈이 흩날렸다.
“나를 네 위로 올려 다오. 나를 받으라.”
급하게 출발하느라 미처 손질하지 못한 빙벽 장비와 크렘폰(=아이젠)을 체크하고는 쏟아질 듯 노려보는 거대한 빙벽에 왼손을 붙이고 눈을 감는다. 오르기 전 두려움을 잗다란 리츄얼로 날려 버릴 순 없으나 신의 모습 같은 빙벽 앞에 천박한 인간이 마주한 것은 불경이므로 마음 속 경외를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이 유난한 날이 있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날도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의 근거와 증거는 잘 알지 못했으나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꽤 가까이 자리하고 있을 터. 내가 살아,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추락에 깊이 관여하는 오름 짓을 거두지 않는 이유를 나는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가 참견하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얼굴을 쳐들’뿐이다.
피잉, 툭, 챙, 오르기 전, 장비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채찍소리에 긴장감은 고조된다. 두려움의 소리다. 나를 압도하는 빙벽에 내 마음은 이미 엎드렸으나 육신만이 꼿꼿하다. 탐구해야 할 것은 거대한 벽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거대한 얼음을 마주하고 있으며 얼음이 얼어 붙었기로 내가 그 앞에 서 있다. 내가 그를 오르는 풍경은 큰 얼음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인데 벽을 오름으로 나의 일부가 벽이 되고 그 벽에 내가 들러 붙어 있기로 나는 벽의 일부가 된다. 내 살아있음으로 마주 대한 얼음 벽과 나 사이에 그 어떤 매개 없이 존재로서의 동질감은 이제, 오르며 느끼게 될 터였다. 논리와 기술이 통하지 않는 그 벽, 더 이상 기계가 오르지 못하는 그 벽을 오로지 본능을 더듬거리며 말이다.
아이젠을 얼음 짝에 세우기 전, 연습 삼아 왼손 피켈을 힘껏 내리치니 피켈 끝으로 미세한 진동이 전달된다. 제대로 먹힌다. 오늘, 이 벽은 나를 받아 줄 것인가. 연이어 휘두른 오른손 피켈은 청빙에 퉁겨져 나가며 피크(피켈의 날 앞부분)가 돌아갔다. 뭔가 좋지 않다. 세밀하게 체크하지 못한 장비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산, 오늘 이 얼음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그널임을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제야 주위의 어수선함과 미리 오르고 있는 다른 팀 선등자가 ‘떨어지는 얼음을 조심 해라’는 고함 소리(‘낙빙’이라 고함 친다)가 들려온다. 멍하니 돌아간 피크를 보고 있는 나를 향해 고함치는 선배님들의 호통소리가 비로소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 간 밤, 꿈에, 커다란 빙벽의 중턱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었었다. 떨어지며 양팔과 두 발을 휘저었고 땅에 떨어질 찰나에 덮었던 이불을 움켜쥐었고 ‘끄응’하며 뒤척였다. – 등반이 시작된다. 이미 몸은 굳어 있다. 아이젠과 피켈이 제대로 먹혔음에도 연신 발길질과 스윙을 해대었다. 믿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굳은 동작이 먼저인지 떨어져 가는 체력이 먼저인지 알지 못했고 출반 전 돌아간 피크만 생각날 뿐이다. 등반의 동작 메커니즘은 이미 무너졌다. 첫 번째 확보물을 어렵게 설치한 다음 약간의 안정을 찾았지만 리드미컬한 모션을 다시 찾기에는 늦었다. 두 번의 스텝을 이어가다 어제 꿈과 약속한 것 마냥 나는, 자유낙하 했다. 지상으로부터 7m지점을 통과할 때 일어난 일이다. 입사 후 7개월이 지난 때였으며 겨울의 일이었고 당시 내 여자친구와 심하게 다툰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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