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용용^^
  • 조회 수 2334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3년 2월 18일 10시 04분 등록

추락의 추억

 

그 날은 그리도 추웠다. 빙벽을 찾아 거친 사면을 오른다. 가파른 길, 달아오른 열기로도 몸은 데워지지 않았고 두꺼운 장갑에도 추위는 손을 파고 들었다. 납작 엎드린 풀은 메말랐고 그 풀을 얼음이 덮어 빛나지 않던 풀이 빛났다. 얼음에 박제되어 누렇고 작은 풀은 움직이지 못하였으나 얼음 안에서는 한 없이 편안해 보였다. 힘들어 거친 호흡을 토해내는 내 몸뚱아리를 생각하니 풀이 부러워 온다. 얼음 위로 들러 붙은 신설(新雪)은 제 닿는 모든 것들을 미끄러지게 했는데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오른 이유는 단지 청빙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나운 경사를 넘어, 마침내 크고 푸른 빙벽과 마주했을 때 속눈썹을 간질거리며 눈이 흩날렸다.

 

나를 네 위로 올려 다오. 나를 받으라.”

 

급하게 출발하느라 미처 손질하지 못한 빙벽 장비와 크렘폰(=아이젠)을 체크하고는 쏟아질 듯 노려보는 거대한 빙벽에 왼손을 붙이고 눈을 감는다. 오르기 전 두려움을 잗다란 리츄얼로 날려 버릴 순 없으나 신의 모습 같은 빙벽 앞에 천박한 인간이 마주한 것은 불경이므로 마음 속 경외를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이 유난한 날이 있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날도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의 근거와 증거는 잘 알지 못했으나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꽤 가까이 자리하고 있을 터. 내가 살아,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추락에 깊이 관여하는 오름 짓을 거두지 않는 이유를 나는 또한 알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가 참견하지 않는다. 보상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얼굴을 쳐들뿐이다.

 

피잉, , , 오르기 전, 장비가 부딪히는 금속성의 채찍소리에 긴장감은 고조된다. 두려움의 소리다. 나를 압도하는 빙벽에 내 마음은 이미 엎드렸으나 육신만이 꼿꼿하다. 탐구해야 할 것은 거대한 벽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거대한 얼음을 마주하고 있으며 얼음이 얼어 붙었기로 내가 그 앞에 서 있다. 내가 그를 오르는 풍경은 큰 얼음의 풍경이자 나의 풍경인데 벽을 오름으로 나의 일부가 벽이 되고 그 벽에 내가 들러 붙어 있기로 나는 벽의 일부가 된다. 내 살아있음으로 마주 대한 얼음 벽과 나 사이에 그 어떤 매개 없이 존재로서의 동질감은 이제, 오르며 느끼게 될 터였다. 논리와 기술이 통하지 않는 그 벽, 더 이상 기계가 오르지 못하는 그 벽을 오로지 본능을 더듬거리며 말이다.

 

아이젠을 얼음 짝에 세우기 전, 연습 삼아 왼손 피켈을 힘껏 내리치니 피켈 끝으로 미세한 진동이 전달된다. 제대로 먹힌다. 오늘, 이 벽은 나를 받아 줄 것인가. 연이어 휘두른 오른손 피켈은 청빙에 퉁겨져 나가며 피크(피켈의 날 앞부분)가 돌아갔다. 뭔가 좋지 않다. 세밀하게 체크하지 못한 장비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산, 오늘 이 얼음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그널임을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제야 주위의 어수선함과 미리 오르고 있는 다른 팀 선등자가 떨어지는 얼음을 조심 해라는 고함 소리(‘낙빙이라 고함 친다)가 들려온다. 멍하니 돌아간 피크를 보고 있는 나를 향해 고함치는 선배님들의 호통소리가 비로소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 간 밤, 꿈에, 커다란 빙벽의 중턱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꾸었었다. 떨어지며 양팔과 두 발을 휘저었고 땅에 떨어질 찰나에 덮었던 이불을 움켜쥐었고 끄응하며 뒤척였다. – 등반이 시작된다. 이미 몸은 굳어 있다. 아이젠과 피켈이 제대로 먹혔음에도 연신 발길질과 스윙을 해대었다. 믿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굳은 동작이 먼저인지 떨어져 가는 체력이 먼저인지 알지 못했고 출반 전 돌아간 피크만 생각날 뿐이다. 등반의 동작 메커니즘은 이미 무너졌다. 첫 번째 확보물을 어렵게 설치한 다음 약간의 안정을 찾았지만 리드미컬한 모션을 다시 찾기에는 늦었다. 두 번의 스텝을 이어가다 어제 꿈과 약속한 것 마냥 나는, 자유낙하 했다. 지상으로부터 7m지점을 통과할 때 일어난 일이다. 입사 후 7개월이 지난 때였으며 겨울의 일이었고 당시 내 여자친구와 심하게 다툰 다음 날이었다.

IP *.51.145.193

프로필 이미지
2013.02.18 19:41:48 *.194.37.13

사고가 있기 전에는 분명 신호가 오는 것 같다.

내 경험으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는데,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사고가 발생되는 순간

후회하게 되더라구.

하지만, 그 사고의 순간에 살아날 것 같은 예감이 함께 느껴졌어.

 

 

프로필 이미지
2013.02.20 07:37:47 *.51.145.193

그러니까요, 떨어질 때 편안했던 그 기분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12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secret [2] 2009.01.12 205
5211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secret [6] 지희 2009.01.20 209
5210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secret 지희 2009.02.10 258
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2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7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51
5201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200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82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90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7
5197 (보따리아 칼럼)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4] 보따리아 2017.07.02 1798
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802
5195 일상의 아름다움 [4] 불씨 2018.09.02 1807
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10
5193 #10 엄마와 딸 2–출생의 비밀_이수정 [5] 알로하 2017.07.03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