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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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영웅에 대하여
히틀러는 영웅이다. 그리고 이영에는 예쁘다.
대장금에 출연한 이영에는 주인공 서장금과 일치되어 여전히 우리 할머니에겐 이영애가 아니라, 장금이다. 장금인 요리도 잘하고, 의술도 뛰어나고, 호기심도 강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고, 끈질기고, 신념도 강하고, 정직하다. 이런 장금이에겐 그녀를 지켜주는 민 종사관 나으리도 있고, 음식을 만드는 기술과 음식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스승 한상궁이 있다. 의술을 가르쳐 주고 의술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쳐 주는 스승 장덕이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장금이 스스로의 재능과 의지, 또다른 많은 이들에 대한 배움과 사랑이 장금이를 이끌었다. 이렇게 서장금은 ‘한민(한상궁과 민 종사관)’족을 양쪽에 쥐고서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였다.
대장금에 대한 열화와 같은 성화는 시청률로도 나타났다. 그런데 대장금이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중, 갑작스럽게 시청률이 추락했다. 당시 전개되던 내용은 한상궁과 장금이 역모로 몰리며 한상궁이 죽게 되는 내용이었다. 시청자들은 한상궁이 죽어서는 안된다며 한상궁 살리기 운동을 펼쳤고 끝내 한상궁이 죽자 분노로 인한 반작용이, 선인이 악인에 의해 축출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허탈함이 TV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실제로 이 내용을 벗어나서는 시청률은 상승모드로 돌입했고 장금이와 한상궁은 현대 여성 영웅상을 창조했다며, 또한 누구 누구를 닮았다며 떠들어댔다.
히틀러 이야기로 돌아가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홀라당 채우고도 몇 페이지 더 차지하고 있는 그는 나치에게, 독일인에게 절대적인 우상이었고 또한 영웅이었다. 히틀러는 암묵적이고 맹목적인 나치당원과 독일 국민들의 동의 아래 찬란한 영웅적 행위를 펼쳐 냈다. 리더십에 관한 한 지금도 탁월함을 인정받으며 한때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노미네이트되었다 한다.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데 일조했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를 제작함으로써 말이다. 물론 리펜슈탈로 하여금 그를 영웅화시키는 영화를 만들도록 한 것은 히틀러 본인이니, 그 자신 스스로를 영웅화한 셈이다.
‘영웅’창조를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불림을 당하는 자와 부르는 자다. 히틀러 같은 예외자가 더러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이 후자를 택한다. 대다수는 스스로 영웅이 되려 하기보다는 누군가가 영웅이기를 바란다. 영웅의 길은 험난하고 고되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미 험난함과 고됨에 푹 담겨진 이들에겐 영웅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웅이란 누구인가. 영웅은 누가 규정짓는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결론은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마다 요구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이다. 먼 옛날 옛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나라에는 민족적 영웅이 있어 왔고 또한 사회적인 변혁을 이끌어 낸 이들을 영웅으로 불러왔다. 이들 모두는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 사람들이다. 오늘날은 예전처럼 민족주의적인 영웅도, 변혁과 개혁을 부르짖는 영웅도 불러내지 않는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시대, 매스미디어의 시대, 소비주의적인 시대, 가치가 다양화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몰가치한 이 시대에, 영웅은 언론이 만든다. 현대의 영웅 또한 하나의 상품이다. 상품을 팔 듯 영웅의 이미지를 팔아낸다. 소비하는 이들은 그에 맞추어 상품을 선택한다.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버리면 된다. 아니면 그만이다. 에잇, 기대한만큼 비난질을 퍼붓고 돌아서면 된다. 또다른 상품을 찾는다. 또다시 누군가가 또다른 이미지로 포장된 채 영웅화된다. 우리는 한동안 그 포장을 벗기지 못하고 따르게 될 것이다. 레니 리펜슈탈과 같은 뛰어난 다큐멘터리 작가의 화려한 기술에 속아 본질을 잊어버리고 침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한상궁을 살려내라니, 드라마 속 인물의 삶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마냥 쉽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만큼 호도되기도 쉽다. 여전히 이영애를 장금이로 기억하며 한상궁의 삶을 되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상궁을 죽이면 안된다고 외치지만, 죽고 나면 그대로 살아지는 우리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영웅을 원한다. 스스로 영웅이 되는데 두려움을 느끼며 이것저것 골라 담아 본다. 영웅은 드라마 주인공일 때도 있고, 스포츠인일 때도 있고, 물론 정치가일 때도 있다. 이름붙이기 나름이다. 몬주익의 영웅, 런던의 영웅, 빙판의 영웅, 주식투자의 영웅, 흑인 영웅, 여성 영웅, 진정한 영웅, 소심한 영웅, 한심한 영웅, 그냥 영웅, 우리들의 영웅, 어제의 영웅, 오늘의 영웅, 내일의 영웅. 어느새 영웅은 보통명사화된다. 개인의 몰가치를 더욱 고정한다.
우리는 영웅이 아닌 만들어진 영웅이미지를 열광하고 추앙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고 영웅이 되려 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끌어주리라 기대하는 이를 만들어놓고, 빌고 빌고 또 빈다. 영웅은 우리에게 희생물이다. 저 그리스 신전에 바쳐진 제물과도 같은 것이다. 가치의 혼돈 속에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아무도 응답하지 않고, 우리는 응답하라 영웅이여를 외치면서도 영웅이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영웅인지 모른 채 오늘도 슬프고 고된 하루를 시작한다.
나 역시 보다 이상적인 가치를 이끌어 내고 실천하는 삶을 어려워하기에 나 자신 영웅되기를 주저하지만, 마음 속에 영웅을 품고 살고 싶다. 상품처럼 소비해야 할 타인이 규정한 영웅이 아니라 그냥, 내 삶의 변혁을 일깨워주는 이로 내 마음 속에 조용히 키우련다. 나의 영웅이 너의 영웅이어야 한다고 외치지는 않겠지만 그의 삶의 이야기를 가위손의 여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 아이의, 내 손주들의 베게머리 맡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련다.
“나의 영웅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