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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ace 3.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9년)
2013.2.17
1. 저자 만나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내가 몰랐던 신세계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라는 사실만 알았을 때 내가 상상한 그의 모습은 그저 유쾌하고 삶을 한없이 긍정하고 즐기는, 넘치는 욕구와 활력으로 빛나는 그리스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남긴 인생의 기록에서 나는 희미하게, 삶을 다 끝까지 용기있게 살아낸 데미안, 노년의 싱클레어를 떠올린다. 1883년, 터키 지배 하에 있던 크레타섬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해방을 위해 싸웠던 조부와 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유년 시절 두 번의 반란을 경험하여, 결국에는 크레타의 해방을 맞은 후 아테네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이때
첫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여 이름을 을 얻었고, 파리 유학을 시작으로 평생 외국을 떠돌며 공부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른 나이에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책상 머리에 앉아 세상을 논하는 지식인에 머무르지
않고, 제 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세계 각지에 피난해있던 그리스인들을 본국에 귀환시키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러시아 혁명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새로운 사회와 시대를 꿈꾼 러시아의
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경험들을 소설과 여행기로 남겼다. 평생 신과 구원, 자유와 투쟁의 주제로 씨름하던 그가 평화를 얻은 것은, 조르바라는
생명력 넘치는 그리스 사내를 만나서가 아닌가 싶다. 영혼의 자서전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임한
작품이며, 그가 일생에 걸쳐 탐구한 신과 위인들과의 만남과 투쟁, 화해와
구원, 궁극적인 자유로의 여정을 보여준다. 1906년(23세) 소설 ‘뱀과 백합’ 출간 1907년(24세) 희곡 ‘먼동이 틀 때’ 발표. 파리
유학 1908년(25세) 소설 ‘부서진 영혼’ 완성 1909년(26세) 법철학과 국가철학으로
본 니체 논문 발표. 단막극 ‘코메디’ 발표 1911년(28세) 갈라테아와 결혼 1912년(29세) 자원입대하여
발칸전쟁 참전 1917년(34세)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로고스 조르바와 갈탄 채굴 및 벌목 사업 1919년(36세) 그리스 공공복지부
국장에 임명. 러시아 내전으로 발이 묶여 처형위기에 처한 그리스인 구출작전에 참여. 1927년에 작전 종료 1923년 ‘신의 구세주들’ 출간 1925년 ‘오디세이아’ 1-6편
완성 1929년 ‘토다 라바’ 집필 1936년 ‘돌의 정원’ 집필 1937년 ‘스페인 기행’ 출간 1938년 서사시 ‘오디세이아’ 최종
원고 완성, 출판 1943년 ‘그리스인 조르바’ 발표 1945년 2차 대전 종료 후 그리스 정무장관 취임했으나 사임. 알레니 사미우와 재혼 1948년 ‘그리스인의 수난(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출간. 1951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름 1949년 그리스 내전을 소재로 한 ’전쟁과 신부’에 착수. 희곡 ‘쿠로스’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씀 1950년 ‘미할리스 대장’ 집필 1951년 ‘최후의 유혹’ 초고
완성 1953년 소설 ‘성
프란체스코’ 집필. ‘미할리스 대장’ 출간 1954년(71세) ‘최후의 유혹’이 로마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름 1957년(74세)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에서 아시아독감으로 사망. 1961년 사후 자전적 소설 ‘영혼의 자서전’(Report to Greco) 출간 1968년 아내 엘레니 사미우가 쓴 전기 ‘니코스 카잔차키스’ 출간 1988년 ‘최후의
유혹’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됨 한 사람의 영혼이 이토록 처절한 분투를 일생 동안 계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상상하기도 버겁고 괴롭다. 카잔차키스의 일생을 살피다 보니
글을 써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시도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건지를
가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년의 그가 쓴 소설 같고 자서전 같은 글을 통해 멈출 수 없는
영혼의 투사인 카잔차키스를 만났다. 누구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만났다면
나는 그를 좀 더 친근하고 만만하고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기에도
버거운 치열한 삶을 산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애정과 공감으로 내 맘을 두드리는 한 작가로 다시 만나고
싶다. 조르바와 함께 어깨동무한 그를 꼭 한번, 만나러 가야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영혼의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나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나에게만 지극히 상대적인 약간의 가치를 지닌다. 그
삶에서 내가 인정하는 가치라고는 그것이 지닌 힘과 끈질긴 인내심에 의존하여 내 나름대로 <크레타의
경지>라고 이름지은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독자여, 그대는 이 지면에서 내 핏방울들이 남긴 붉은 자취를, 인간과 정열과 사상을 찾아다닌 내 여로의 자취를 찾게 될 것이다.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골고타를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걸음 나아가다가 여로의 중간에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기 때문에 골고타의 정상에, 그러니까 의무의 정상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다른 자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처형이 두려워 그들은 마음이 약해지고, 부활에로의 길이
십자가 뿐임을 모른다. 다른 길은 없다. 내가 오르는 길의 결정적인 단계는 넷이었고, 그 단계는 저마다 성스러운 이름을
지닌 인물들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 위대한 영혼들을 하나씩 거치는 피의 여로를 – 거칠고, 쉴
곳도 없는 운명의 산을 참고 견디며 오르는 인간의 여로를 – 이 여행기에 남기려고 노력할 터이다. 내 영혼 전체는 외침이요, 내 모든 작품은 그 외침에 대한 설명이다. 내 생애에 항상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한 단어는 언제나 <오름> 하나 뿐이었다. 여기에서 진실과 환상을 섞어 가며 나는 산을
오르느라고 남긴 붉은 발자취와 함께 이 오름을 기록하고 싶다. 대지에서 내가 지나가며 남긴 자취는 그
핏자국 뿐이므로, <검은 투구>를 쓰고 흙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나는 어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마음이 초조하다. 내가
글로 썼거나 실제로 한 행동들은 무엇이든 물에다 쓰고 행하였으므로 벌써 사라졌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내 기억력을 더듬었고, 허공에서 내 삶을 엮었으며, 장군 앞의 병사와 같은 자세로 그리스인에게 이 말을 한다. 그 까닭은
그리스인은 나와 같은 흙으로 빚어졌고, 과거나 현재의 어떤 투쟁자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위에 똑 같은 붉은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가? (작가노트. p7-8) 그가 죽음을 예감하며 쓴 글임을 알고 나서, 모든 문장이
절절하게 와 닿는 변화를 체험했다. 이것은 그냥 문장가의 절필이 아니었구나. 자신이 흘린 핏자국을 더듬는 전사의 기록이구나.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p9) 이 기도문도,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읽었을 때와 그가 책 속에서 다시 언급한 순간에 그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지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틔워주었다. 프롤로그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아직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았지만 성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밤은 대지로부터 솟아 나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구원이 없음을
안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숨을 거두어야 하리라. 나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누구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가? 산과, 바다와, 발코니 위로 포도가 무겁게 얹힌 격자 울타리에게? 미덕에게? 죄악에게? 신선한 물에게? …. 덧없도다! 이 모두가 나와 더불어 무덤으로 내려가리라. 누구에게 나는 내 기쁨과 슬픔을 – 젊은 시절의
엉뚱하고 신비한 그리움을, 그 다음에 벌어진 신과 인간과의 처절한 싸움을, 그리고 결국은 불에 탈지언정 죽을 때까지 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노인의 야수적인 긍지를 털어놓아야 하는가? 신을 향해 거칠고 쉴 곳도 없는 산을 기어오르다가 지쳐 미끄러지고 쓰러지기 얼마였으며, 피투성이가 되어 일어나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이 또 몇번이었는지를 누구에게 나는 얘기하겠는가? 어디에서 나는 나처럼 수많은 상처를 입은 불굴의 영혼을, 내 고백을
들어줄 영혼을 찾아내겠는가? (p11) 장군이여, 전투가 끝나가니 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싸웠노라. 나는 부상을 당해 쓰러졌고, 용기를 잃었지만 싸움터를 버리지는 않았다. 비록 겁이 나서 이빨이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나는 피를 감추기 위해 빨간 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는 공격을 하러 달려갔다. 나는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작은 한 덩이 흙만 남을 때까지 내 갈까마귀 영혼의 소중한
깃털을 하나씩 하나씩 뽑으리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당신에게 내 투쟁의 이야기를 하겠노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미덕과 수치와 진실을 던져 버리겠다. 내 영혼은
당신의 작품인 <폭풍같은 톨레도 칼>을 닮아서, 노란 번겟불과 위압적인 검은 구름을 허리에 차고, 빛과 어둠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물러설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인다. 당신은 내 영혼을 보고,
칼날 같은 눈으로 살펴보고, 심판을 내리리라.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는 엄숙한 크레타의
격언을 당신은 아는가? 만일 실패했다면, 나는 목숨이 단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공격을 하러 돌아가리라. 성공을 거두었다면, 나는 땅을 갈라 열어서 당신에게로 가 그 옆에 누우리라. 그러니 장군이여, 내 말을 듣고 심판하라. 내 삶의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여,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싸웠으며, 만일 내가 다쳐 쓰러졌으며, 남들이 내 고통을 알지 못하게 숨겼으며, 만일 적으로부터 내가 한번도 도망친 적이 없었음을 알겠다면….. 나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p20)
여기서 장군은 그리스인이던가. 할아버지는 아마도 엘 그레코이겠지. 처음 읽을 때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멋진 출사표처럼 여겨졌던 이 프롤로그가 지금은 얼마나 장엄하고 처절한 외침으로 들리는지. 원제를 몰랐다면 아마 절대 이해 못했을 엘 그레코의 존재. 이 하찮은 사건은 이렇게 늙어버린 지금까지도 내가 현실을 맞는 자세를 완전하게 보여준다. 나는 더 밝고 훌륭하고, 내 목적에 알맞게끔 세상을 재창조한다. 이성은 외치고, 설명하고, 전시하고, 항의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느 목소리가 솟구쳐 고함친다. <이성이여, 조용하라. 우리
마음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어떤 감정인가? 광증, 삶의 본질. 그러면 마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비잔틴 신비주의자가 말했다. ‘현실은
바꿀 수 없을 터이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꾸자.’ 어렸을 때 나는 그렜고, 지금도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p52) 훨씬 더 나중에 세르반테스의 책을 읽었을 때, 주인공
돈키호테는 우리들의 초라한 일상생활을 초월해서 표면적인 사물들의 뒤에 숨은 본체를 찾으려고 남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길을 떠난 위대한 성인이요
순교자처럼 여겨졌다. 어떤 본체였던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다. 영원히 똑같은 단 하나의 본체 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간은 – 비록 그 목적이 터무니 없을 망정 – 개인을 초월하는 목적을 위해 한 개인을 순종시키고 물질을 배척하는 길 이외에는,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음을 믿고 사랑한다면
헛될 일이 없으니, 오직 용기와 믿음과 보람 있는 행동 만이 존재한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관심을 초월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을 초월하고, 우리 자신보다 높은 목적을 설정해서 비웃음과 굶주림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아니, 달성이 아니다. 자신을
아끼는 영혼이라면 이 목표에 다다르자마자 곧 그것을 더 멀리 밀어 놓는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 한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에 숭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한다. (p102) 나는 흠뻑 젖었다. 기쁨을 감추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지 보려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흐느껴 울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지를까? 건조장을 지나다 보니 우리 포도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던 아버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그 두에 서서 훌쩍훌쩍 울었다. “아버지. “ 내가 소리쳤다.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시끄럽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 나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우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욕이나 애원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기억했다.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p108) 참으로 고목처럼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선 인간. 이런 사람을 아버지로 둔 자식은 인생에 무엇보다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냉혹하게 행동했는지를 나중에 가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신교수법을 채택하지 않고, 종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인
무자비한 옛 방법을 따랐다. 늑대가 처음 낳아 소중히 여기는 새끼를 가르치는 방법이 그러하니, 어미는 새끼에게 사냥하고 죽이는 방법과, 꾀나 용기로 함정을 피하는
수단을 가르친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항상 나를 지켜준 인내와 집념을 나는 아버지의 냉혹한 가르침에서
얻었다. 삶이 끝나가는 지금 나를 다스리고, 신이나 악마에게서
위안을 받아들이는 몰락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불굴의 사상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얻었다.(p117) 젊음은 눈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 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 – 그것이 젊음이다. (p174) 나는 파르테논이 2나 4처럼 짝수라고 생각했다. 나는 짝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숫자들의 삶은 너무 편안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위치가
견고하고, 위치를 바꾸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만족하고, 보수적이고, 걱정이 없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욕망을 실현하며, 차분해졌다. 내 마음의 맥동에 맞는 것은 홀수였다. 홀수의 삶은 전혀 편안하지
않다. 홀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것을
바꿔 보고, 보태고, 더 밀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한쪽 발로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떼어 떠나려고 한다. 어디로
갈까? 잠깐 멈춰 숨을 돌리고 새로운 추진력을 얻기 위해 다음 짝수로 간다. (p181)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왠지 알 것만 같은 그의 취향. 짝을 이뤄 균형 잡힌
모습으로 두발을 단단하게 땅에 뿌리박은 짝수. 스스로 만족하여 완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보수적인
가치와 사람들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인고로. 반면, 한발로 위태하게 또는 불안정하게 서서 잠시의 균형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홀수의 역동성과 절박함이 훨씬
가까이 여겨지는 탓이다. 저마다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처럼 가득 찬 영혼을 지닌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언제 그들이 꽃피고, 언제 그들이 열매를 맺으려나? 나는 혼자 생각했다. ‘하느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그런 날을 볼 때까지 살게 해주시고 내 마음 속의 꽃봉오리들이 터져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보게
해주소서.’하고 나는 기도했다. 나는 작별이라도 고하듯 초조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끼며 친구들을 보았다. 자연이 싹틀 때 불어 닥치는 세월의 태풍이 그들의 영혼을
홀랑 벗기고 무자비하게 날려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p184) 그리스에서는 정신이란 물질의 계속이요 꽃이며, 신화란 가장 긍정적인 현실의 단순하고 종합적인
표현임을 인간은 확인한다.(p210) 겉으로 나타나거나 속에 담긴 운동의 미덕을 그토록 완전하게 이해했던 민족은 또 없었다. 자연의
힘이나, 야생 짐승이나, 굶주림이나, 목마름이나, 질병 같은 주변의 적을 물리치는 날마다의 많은 부담
때문에, 어쩌다 기운이 남으면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었다. 남은
힘이 운동 경기에서 소모되게 마련이다.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에 문명도 싹이 튼다. 적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며 지상에 존속하기 위해 생존의 투쟁이 계속되는 한 문명은 태어나지 못한다. 삶이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약간의 여유를 누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문명은 태어난다. 이러한 여유는 어떻게 쓰였고, 여러 사회 계층에 어떻게 분배되었으며, 어떻게 최대한 증가시키고 가꾸었던가. 종족과 시대가 저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에 따라서 해당 문명의 가치와 실체가 심판을 받는다. (p224) 그리스를 돌아다니는 그리스인의 여행은 이런 숙명적인 과정을 통해 그의 의무를 찾으려는 힘겨운 추구로 변한다. 어찌해야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면서 민족의 전통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그의 두 어깨에는 살아 숨쉬는 모든 그리스인의 어깨에는
엄격하고 벗어나기 어려운 책임감이 무겁게 짓누른다. 이름 자체가 마술적인 무적의 힘을 지닌다. 그리스에서는 태어난 모든 사람이 영원한 그리스의 전설을 이어받을 의무를 타고난다. 현대 그리스인의 마음은 조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탐미적인 경외감의 냉담한 전율을 느끼지 않는다. 지역마다
마라톤, 살라미스, 올림피아, 테르모필레, 미스트라 같은 이름이 붙었고,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했고 저곳에서는 영광을 누렸다는 추억이 저마다의 이름에 붙었다. 순식간에 지역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두루 섭렵한 역사로 변형되고, 그리스인
순례자는 영혼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리스의 모든 지역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는 성공과 실패로
넘치고 인간의 투쟁으로 가득해서, 우리들이 피하지 못할 준엄한 교훈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함성이 되고, 그런 함성에 기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리스의 위치는 참으로 비극적이어서, 모든 현대 그리스인의 어깨에 위험하고도 지극히 수행하기
어려운 의무를 부과한다. 우리들은 무척 무거운 책임감을 떠맡는다. 동양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고, 서양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며, 항상
그렇듯 상충하는 두 추진력 사이에 끼인 그리스는 또다시 소용돌이를 이룬다. 이성과 경험적 추구의 전통에
따라 서양은 세계를 정복하려고 나서며, 무서운 잠재력의 충동을 받은 동양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달려 나간다. 중간에 위치한 그리스는 세계의 지리적이고 정신적인 교차로이다. 거대한 두 추진력을 절충시켜 총체를 찾아내는 사명 또한 그리스의 의무이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p239) 카잔차키스가 살아서 지금 그리스의 망가진 모습을 보았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듯. 과거에는
터키와의 대치 상태나 2차 대전 같은 외부적 요인을 이야기했겠으나, 지금은
외부적 요인 못지 않게 내부적인 판단착오와 부패가 나라 경제와 국민의 생활 기반을 망가뜨린 상황이니. 나에게는 부족한 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세가지 광포한 야수는 다
같이 환희를 느꼈고, 다 같이 만족했으며, 그들의 굶주림은
다 같이 사라졌다. 영혼과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줄곧 평생 처음으로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인간은 늙거나 병들었거나 불운이 닥칠 때만 그런 요소들이 내면에서 서로
분여하고 맞서 싸운다. 때로는 육체가 지배하고 싶어 하며, 때로는
영혼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고 도망치려 한다. 그리고 이성은 무감각하게 물러서서 붕괴의 과정을 지켜보고
점검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리고 튼튼할 때는 그 세 가지가 같은 젖을 빨면서 세 쌍둥이처럼 우애로 단결되지
않던가!(p239) 나는 아직도 사춘기의 솜털을 벗지 못했던 소박한 촌뜨기였고, 처음으로 외국을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기쁨이 어찌나 컸던지 때로는 겁이 잔뜩 났다. 겁이 난 까닭은 신이란 질투심이 많은 존재들이며, 행복감을 의식하는 행위가 후브리스(교만함)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을 홀리기 위해서 나는 행복감을
줄여보려는 우스꽝스런 계획에 의존했다. (p240) 동티가 난다는 표현과 통하는 것인가. 사전을 보니 동티는 땅, 돌,
나무 따위를 잘못 건드려 지신(地神)을 화나게 하여 재앙을 받는 일이라고. 여하간 귀한 아이일수록
천한 이름을 붙이고, 기쁜 일이 있을수록 공공연히 과시하는 행위를 말렸던 것들이 그에 해당한다면, 서양이든 동양이든 신은 질투심 많은 존재이고 인간의 오만함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진 듯 하다. 주어진 모든 대상들 가운데 인간의 기억력이 무엇을 선별하여
간직하는지는 하나의 신비이다. (p243)
어찌 남게
되었는지 모를 그 기억이 마치 낙인처럼 나의 마음 안 깊은 곳에서 나를 조종한다. 어린 시절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어른인 나를 여전히 굶주리고 목마른 존재로 몰고 가듯이. 기왕이며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 감탄과 즐거움의 기억이 남아 있기를. “신부님, 난 ‘항상 불안하다’는 다른 이교에 속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줄곧 싸움을 해왔어요.” “누구와 싸웠나요?” 나는 주저했다. 갑자기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구하고요?” 수사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다니
나에게로 몸을 수그리며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신하고요?” “네.” 노인은 아무 말도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것은 병일까요, 신부님? 나는
어찌 해야 병이 나을까요?” “영원히 병이 낫지 않기를 기구합니다!” 그는 나를 축복하려고 또는 저주하려고 두 손을 쳐들었다. “동등하거나 열등한
상대와 싸운다면 화가 미칠지어다. 하지만 신과 싸우다니, 그런
병이 낫는다면 화가 미칠지어다.”(p405) “네 마음 속에서 구원이 무르익을 때까지. 시큼한 포도가 꿀맛을 내게 될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데 신부님, 시큼한 포도가 언제 꿀맛을 내게 되는 지 어떻게 압니까?” “어느 날 아침에 잠이 깨면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리라. 하지만 달라진 rjs 세상이 아니라 너란다. 구원이 네 마음 속에서 무르익었을 테니까. 그 순간에 하느님께 몸을 바치고, 절대로 신을 배반하지 말지어다.”(p410)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불안을 메꿀 무언가를 또 찾아 움직였을 때 어떤 결과가 올까. 나는 충분히
기다렸을까. 기다림이 필요할 만큼 절실하긴 했나. 모르겠다. 비록 가장 힘든 오름길에 나서기는 했어도 당신은 꼭대기에
이르려고 조급한 나머지, 날개 달린 독수리라도 된 듯 산기숡과 등성이는 거치지도 않고 곧장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더
낫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은 인간일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날개가 아니라 다리가 달렸어요. 그래요. 인간의 궁극적 욕망이 성스러움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다 좋습니다만, 우린 우선 모든 작은 욕망들부터 채운 다음에라야, 육체와 권력과 황금과 반항에 대한 열망을 경멸하는 길을 터득해야 해요. 내
얘긴, 우리들이 젊음과 남자다운 모든 욕정의 삶을 한껏 살아보고, 모든
우상들을 때려부숨으로써 그것들이 바람과 꺼풀로만 가득 찼음을 알아내고, 돌아보아도 절대로 유혹받지 않을
만큼 우선 속을 비우고 깨끗해져야 한다는 거죠. 그런 다음, 그런
다음에야 우리들은 신 앞에 나서게 되는데…. 참된 투쟁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p414) “그래요, 그건 사탄이지만,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 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어야 해요… 시간과 포만과 수련은 이런 어두운 힘을 정신력으로 바꿔 놓는답니다.”(p415) “그러면 그리스도의 종교는 또다시 도약하게 되죠. 그리스도의 종교는 지금처럼
반쪽인 영혼만 받아들이지 안고 인간 전체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리스도의 자비심이 더 넓어지죠. 그리스도의 종교는 영혼 뿐 아니라 육체도 받아들여 신성화하고, 육체와
영혼은 적이 아니라 동지임을 깨닫게끔 그렇게 가르칠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악마는 우리들에게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합니다. 영혼 뿐 아니라 육체도 긍휼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두 야수를 화해시킬 만큼 언제 넓어질까요?”(p416) “성공 여부는 묻지 말아요. 가장 중요한 건 성공 여부가 아니죠, 그것을 더 키우겠다는 당신의 투쟁의지가 훨씬 중요해요. 신은 우리에게서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우리들이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건 신이 따질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예요.”(p417)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나의 손에 달려있지 않으니, 그저 오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사회생활 15년 차의 지친 직장인에게 이것은, 어떤
저주인가. 이걸 믿고 몸을 던지는 절박함과 과감함을 과연, 나는
발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도 실패는 하지 않도록 이중 삼중의 안전망이 없이는 한발짝도 떼지 않는
소심하고 용의주도한 사회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로구나. 어떻게 달려나갈까. 나는 피곤해졌다. 여전히
나는 젊었고, 젊음의 끝없는 욕구가 부담스러워졌다. 젊음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만큼 겸손하지 않고, 능력은 적지만 추구하는 바가 많다.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노력했고, 그래서 투쟁에 지친 나는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들의 산을 마주 보고, 페스 모를
비스듬히 쓰고 한껏 웃어대는 아니 먹은 지도자들을 만나, 다시 한번 전쟁과 자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고향 땅을 밟아 기운을 얻고 싶었다.(p418) 언젠가 어느 크레타인이 나에게 말했다. “천국의 문 앞에 네가 나타났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으며, 문을 두드리지
마라. 어깨에서 총을 내려 쏘아 버려.” “정말 신이 겁을 내고 문을 열어 주리라 믿으세요?” “아냐, 얘야. 신은 겁을 내지
않아. 하지만 네가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문을 열게 되지”(p419)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