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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11시 57분 등록

Book race 3.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9년)


2013.2.17

 

1.     저자 만나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내가 몰랐던 신세계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라는 사실만 알았을 때 내가 상상한 그의 모습은 그저 유쾌하고 삶을 한없이 긍정하고 즐기는, 넘치는 욕구와 활력으로 빛나는 그리스 사내였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남긴 인생의 기록에서 나는 희미하게, 삶을 다 끝까지 용기있게 살아낸 데미안, 노년의 싱클레어를 떠올린다.

1883, 터키 지배 하에 있던 크레타섬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해방을 위해 싸웠던 조부와 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유년 시절 두 번의 반란을 경험하여, 결국에는 크레타의 해방을 맞은 후 아테네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이때 첫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여 이름을 을 얻었고, 파리 유학을 시작으로 평생 외국을 떠돌며 공부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른 나이에 얻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카잔차키스는 책상 머리에 앉아 세상을 논하는 지식인에 머무르지 않고, 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세계 각지에 피난해있던 그리스인들을 본국에 귀환시키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러시아 혁명에 관심을 갖고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새로운 사회와 시대를 꿈꾼 러시아의 시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경험들을 소설과 여행기로 남겼다. 평생 신과 구원, 자유와 투쟁의 주제로 씨름하던 그가 평화를 얻은 것은, 조르바라는 생명력 넘치는 그리스 사내를 만나서가 아닌가 싶다. 영혼의 자서전은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임한 작품이며, 그가 일생에 걸쳐 탐구한 신과 위인들과의 만남과 투쟁, 화해와 구원, 궁극적인 자유로의 여정을 보여준다.     


1906(23) 소설 뱀과 백합출간

1907(24) 희곡 먼동이 틀 때발표. 파리 유학

1908(25) 소설 부서진 영혼완성

1909(26) 법철학과 국가철학으로 본 니체 논문 발표. 단막극 코메디발표

1911(28) 갈라테아와 결혼

1912(29) 자원입대하여 발칸전쟁 참전

1917(34)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델이 된 요로고스 조르바와 갈탄 채굴 및 벌목 사업

1919(36) 그리스 공공복지부 국장에 임명. 러시아 내전으로 발이 묶여 처형위기에 처한 그리스인 구출작전에 참여. 1927년에 작전 종료

1923신의 구세주들출간

1925오디세이아’ 1-6편 완성

1929토다 라바집필

1936돌의 정원집필

1937스페인 기행출간

1938년 서사시 오디세이아최종 원고 완성, 출판

1943그리스인 조르바발표

1945 2차 대전 종료 후 그리스 정무장관 취임했으나 사임. 알레니 사미우와 재혼

1948그리스인의 수난(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출간. 1951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름

1949년 그리스 내전을 소재로 한 전쟁과 신부에 착수. 희곡 쿠로스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950미할리스 대장집필

1951최후의 유혹초고 완성

1953년 소설 성 프란체스코집필. ‘미할리스 대장출간       

1954(71) ‘최후의 유혹이 로마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오름

1957(74)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에서 아시아독감으로 사망.

1961년 사후 자전적 소설 영혼의 자서전’(Report to Greco) 출간

1968년 아내 엘레니 사미우가 쓴 전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출간

1988최후의 유혹이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됨


한 사람의 영혼이 이토록 처절한 분투를 일생 동안 계속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상상하기도 버겁고 괴롭다. 카잔차키스의 일생을 살피다 보니 글을 써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시도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건지를 가늠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년의 그가 쓴 소설 같고 자서전 같은 글을 통해 멈출 수 없는 영혼의 투사인 카잔차키스를 만났다. 누구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만났다면 나는 그를 좀 더 친근하고 만만하고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기에도 버거운 치열한 삶을 산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애정과 공감으로 내 맘을 두드리는 한 작가로 다시 만나고 싶다. 조르바와 함께 어깨동무한 그를 꼭 한번, 만나러 가야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든 글귀

<영혼의 자서전>은 자서전이 아니다. 나 한 개인의 삶은 오직 나에게만 지극히 상대적인 약간의 가치를 지닌다. 그 삶에서 내가 인정하는 가치라고는 그것이 지닌 힘과 끈질긴 인내심에 의존하여 내 나름대로 <크레타의 경지>라고 이름지은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독자여, 그대는 이 지면에서 내 핏방울들이 남긴 붉은 자취를, 인간과 정열과 사상을 찾아다닌 내 여로의 자취를 찾게 될 것이다.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골고타를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걸음 나아가다가 여로의 중간에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기 때문에 골고타의 정상에, 그러니까 의무의 정상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다른 자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처형이 두려워 그들은 마음이 약해지고, 부활에로의 길이 십자가 뿐임을 모른다. 다른 길은 없다.


내가 오르는 길의 결정적인 단계는 넷이었고, 그 단계는 저마다 성스러운 이름을 지닌 인물들의 영향을 받은 시기였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 위대한 영혼들을 하나씩 거치는 피의 여로를 거칠고, 쉴 곳도 없는 운명의 산을 참고 견디며 오르는 인간의 여로를 이 여행기에 남기려고 노력할 터이다. 내 영혼 전체는 외침이요, 내 모든 작품은 그 외침에 대한 설명이다.

내 생애에 항상 나를 괴롭히고 채찍질을 한 단어는 언제나 <오름> 하나 뿐이었다. 여기에서 진실과 환상을 섞어 가며 나는 산을 오르느라고 남긴 붉은 발자취와 함께 이 오름을 기록하고 싶다. 대지에서 내가 지나가며 남긴 자취는 그 핏자국 뿐이므로, <검은 투구>를 쓰고 흙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나는 어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마음이 초조하다. 내가 글로 썼거나 실제로 한 행동들은 무엇이든 물에다 쓰고 행하였으므로 벌써 사라졌다.


나는 기억하기 위해 내 기억력을 더듬었고, 허공에서 내 삶을 엮었으며, 장군 앞의 병사와 같은 자세로 그리스인에게 이 말을 한다. 그 까닭은 그리스인은 나와 같은 흙으로 빚어졌고, 과거나 현재의 어떤 투쟁자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위에 똑 같은 붉은 자취를 남기지 않았던가?  (작가노트. p7-8)  


그가 죽음을 예감하며 쓴 글임을 알고 나서, 모든 문장이 절절하게 와 닿는 변화를 체험했다. 이것은 그냥 문장가의 절필이 아니었구나. 자신이 흘린 핏자국을 더듬는 전사의 기록이구나


세 가지의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p9)

                         

이 기도문도,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읽었을 때와 그가 책 속에서 다시 언급한 순간에 그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지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틔워주었다.


프롤로그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해는 졌고 언덕들은 희미하다. 내 마음의 산맥에는 아직 산꼭대기에 빛이 조금 남았지만 성스러운 밤이 감돌고 있으니, 밤은 대지로부터 솟아 나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구원이 없음을 안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숨을 거두어야 하리라.


나는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누구에게 작별을 고해야 하는가? 산과, 바다와, 발코니 위로 포도가 무겁게 얹힌 격자 울타리에게? 미덕에게? 죄악에게? 신선한 물에게? …. 덧없도다! 이 모두가 나와 더불어 무덤으로 내려가리라.


누구에게 나는 내 기쁨과 슬픔을 젊은 시절의 엉뚱하고 신비한 그리움을, 그 다음에 벌어진 신과 인간과의 처절한 싸움을, 그리고 결국은 불에 탈지언정 죽을 때까지 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노인의 야수적인 긍지를 털어놓아야 하는가? 신을 향해 거칠고 쉴 곳도 없는 산을 기어오르다가 지쳐 미끄러지고 쓰러지기 얼마였으며, 피투성이가 되어 일어나 다시 오르기 시작한 것이 또 몇번이었는지를 누구에게 나는 얘기하겠는가? 어디에서 나는 나처럼 수많은 상처를 입은 불굴의 영혼을, 내 고백을 들어줄 영혼을 찾아내겠는가?

(p11)


장군이여, 전투가 끝나가니 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싸웠노라. 나는 부상을 당해 쓰러졌고, 용기를 잃었지만 싸움터를 버리지는 않았다. 비록 겁이 나서 이빨이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나는 피를 감추기 위해 빨간 수건을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는 공격을 하러 달려갔다.


나는 피와 땀과 눈물로 빚은 작은 한 덩이 흙만 남을 때까지 내 갈까마귀 영혼의 소중한 깃털을 하나씩 하나씩 뽑으리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당신에게 내 투쟁의 이야기를 하겠노라. 나는 짐을 벗기 위해 미덕과 수치와 진실을 던져 버리겠다. 내 영혼은 당신의 작품인 <폭풍같은 톨레도 칼>을 닮아서, 노란 번겟불과 위압적인 검은 구름을 허리에 차고, 빛과 어둠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물러설 줄 모르는 싸움을 벌인다. 당신은 내 영혼을 보고, 칼날 같은 눈으로 살펴보고, 심판을 내리리라.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는 엄숙한 크레타의 격언을 당신은 아는가? 만일 실패했다면, 나는 목숨이 단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공격을 하러 돌아가리라. 성공을 거두었다면, 나는 땅을 갈라 열어서 당신에게로 가 그 옆에 누우리라.


그러니 장군이여, 내 말을 듣고 심판하라. 내 삶의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여,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싸웠으며, 만일 내가 다쳐 쓰러졌으며, 남들이 내 고통을 알지 못하게 숨겼으며, 만일 적으로부터 내가 한번도 도망친 적이 없었음을 알겠다면…..

나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p20) 


여기서 장군은 그리스인이던가. 할아버지는 아마도 엘 그레코이겠지. 처음 읽을 때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저 멋진 출사표처럼 여겨졌던 이 프롤로그가 지금은 얼마나 장엄하고 처절한 외침으로 들리는지. 원제를 몰랐다면 아마 절대 이해 못했을 엘 그레코의 존재.


이 하찮은 사건은 이렇게 늙어버린 지금까지도 내가 현실을 맞는 자세를 완전하게 보여준다. 나는 더 밝고 훌륭하고, 내 목적에 알맞게끔 세상을 재창조한다. 이성은 외치고, 설명하고, 전시하고, 항의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느 목소리가 솟구쳐 고함친다. <이성이여, 조용하라. 우리 마음 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어떤 감정인가? 광증, 삶의 본질. 그러면 마음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비잔틴 신비주의자가 말했다. ‘현실은 바꿀 수 없을 터이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꾸자.’ 어렸을 때 나는 그렜고, 지금도 삶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에는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p52)


훨씬 더 나중에 세르반테스의 책을 읽었을 때, 주인공 돈키호테는 우리들의 초라한 일상생활을 초월해서 표면적인 사물들의 뒤에 숨은 본체를 찾으려고 남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길을 떠난 위대한 성인이요 순교자처럼 여겨졌다. 어떤 본체였던가?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었다. 영원히 똑같은 단 하나의 본체 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간은 비록 그 목적이 터무니 없을 망정 개인을 초월하는 목적을 위해 한 개인을 순종시키고 물질을 배척하는 길 이외에는,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마음을 믿고 사랑한다면 헛될 일이 없으니, 오직 용기와 믿음과 보람 있는 행동 만이 존재한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관심을 초월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을 초월하고, 우리 자신보다 높은 목적을 설정해서 비웃음과 굶주림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아니, 달성이 아니다. 자신을 아끼는 영혼이라면 이 목표에 다다르자마자 곧 그것을 더 멀리 밀어 놓는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 한다. 달성이 아니라, 오름을 절대로 쉬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에 숭고함과 단일성을 부여한다. (p102)

나는 흠뻑 젖었다. 기쁨을 감추려고 애를 쓰면서 나는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나타냈는지 보려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흐느껴 울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지를까? 건조장을 지나다 보니 우리 포도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던 아버지를 보았다. 어머니가 그 두에 서서 훌쩍훌쩍 울었다.

아버지. “ 내가 소리쳤다.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시끄럽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

나는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우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욕이나 애원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기억했다.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p108)


참으로 고목처럼 단단히 뿌리를 박고 선 인간. 이런 사람을 아버지로 둔 자식은 인생에 무엇보다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왜 그토록 냉혹하게 행동했는지를 나중에 가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신교수법을 채택하지 않고, 종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인 무자비한 옛 방법을 따랐다. 늑대가 처음 낳아 소중히 여기는 새끼를 가르치는 방법이 그러하니, 어미는 새끼에게 사냥하고 죽이는 방법과, 꾀나 용기로 함정을 피하는 수단을 가르친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항상 나를 지켜준 인내와 집념을 나는 아버지의 냉혹한 가르침에서 얻었다. 삶이 끝나가는 지금 나를 다스리고, 신이나 악마에게서 위안을 받아들이는 몰락을 범하지 않도록 해주는 불굴의 사상도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얻었다.(p117)


젊음은 눈멀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는 야수이다. 젊음은 먹이를 탐하지만 먹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며, 발길에 채는 행복을 마음만 먹고 주우면 되는데도 줍지 않고, 샘터로 가서 시간이라는 물을 쓸데없이 흘러 말라 버리게 그냥 내버려둔다. 스스로 야수인 줄을 모르는 야수 그것이 젊음이다. (p174)


나는 파르테논이 2 4처럼 짝수라고 생각했다. 나는 짝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숫자들의 삶은 너무 편안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위치가 견고하고, 위치를 바꾸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만족하고, 보수적이고, 걱정이 없었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욕망을 실현하며, 차분해졌다. 내 마음의 맥동에 맞는 것은 홀수였다. 홀수의 삶은 전혀 편안하지 않다. 홀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것을 바꿔 보고, 보태고, 더 밀어 보려고 한다. 그것은 한쪽 발로 땅을 딛고 다른 발은 떼어 떠나려고 한다. 어디로 갈까? 잠깐 멈춰 숨을 돌리고 새로운 추진력을 얻기 위해 다음 짝수로 간다. (p181)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왠지 알 것만 같은 그의 취향. 짝을 이뤄 균형 잡힌 모습으로 두발을 단단하게 땅에 뿌리박은 짝수. 스스로 만족하여 완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보수적인 가치와 사람들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인고로. 반면, 한발로 위태하게 또는 불안정하게 서서 잠시의 균형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홀수의 역동성과 절박함이 훨씬 가까이 여겨지는 탓이다.


저마다 터지지 않은 꽃봉오리처럼 가득 찬 영혼을 지닌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언제 그들이 꽃피고, 언제 그들이 열매를 맺으려나? 나는 혼자 생각했다. ‘하느님이시여, 나로 하여금 그런 날을 볼 때까지 살게 해주시고 내 마음 속의 꽃봉오리들이 터져 어떤 열매를 맺게 될지 보게 해주소서.’하고 나는 기도했다. 나는 작별이라도 고하듯 초조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을 느끼며 친구들을 보았다. 자연이 싹틀 때 불어 닥치는 세월의 태풍이 그들의 영혼을 홀랑 벗기고 무자비하게 날려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p184)

그리스에서는 정신이란 물질의 계속이요 꽃이며, 신화란 가장 긍정적인 현실의 단순하고 종합적인 표현임을 인간은 확인한다.(p210)

겉으로 나타나거나 속에 담긴 운동의 미덕을 그토록 완전하게 이해했던 민족은 또 없었다. 자연의 힘이나, 야생 짐승이나, 굶주림이나, 목마름이나, 질병 같은 주변의 적을 물리치는 날마다의 많은 부담 때문에, 어쩌다 기운이 남으면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었다. 남은 힘이 운동 경기에서 소모되게 마련이다. 운동이 시작되는 순간에 문명도 싹이 튼다. 적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며 지상에 존속하기 위해 생존의 투쟁이 계속되는 한 문명은 태어나지 못한다. 삶이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약간의 여유를 누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문명은 태어난다.

이러한 여유는 어떻게 쓰였고, 여러 사회 계층에 어떻게 분배되었으며, 어떻게 최대한 증가시키고 가꾸었던가. 종족과 시대가 저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에 따라서 해당 문명의 가치와 실체가 심판을 받는다. (p224)

그리스를 돌아다니는 그리스인의 여행은 이런 숙명적인 과정을 통해 그의 의무를 찾으려는 힘겨운 추구로 변한다. 어찌해야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면서 민족의 전통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그의 두 어깨에는 살아 숨쉬는 모든 그리스인의 어깨에는 엄격하고 벗어나기 어려운 책임감이 무겁게 짓누른다. 이름 자체가 마술적인 무적의 힘을 지닌다. 그리스에서는 태어난 모든 사람이 영원한 그리스의 전설을 이어받을 의무를 타고난다.

현대 그리스인의 마음은 조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탐미적인 경외감의 냉담한 전율을 느끼지 않는다. 지역마다 마라톤, 살라미스, 올림피아, 테르모필레, 미스트라 같은 이름이 붙었고,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했고 저곳에서는 영광을 누렸다는 추억이 저마다의 이름에 붙었다. 순식간에 지역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두루 섭렵한 역사로 변형되고, 그리스인 순례자는 영혼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그리스의 모든 지역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는 성공과 실패로 넘치고 인간의 투쟁으로 가득해서, 우리들이 피하지 못할 준엄한 교훈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함성이 되고, 그런 함성에 기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리스의 위치는 참으로 비극적이어서, 모든 현대 그리스인의 어깨에 위험하고도 지극히 수행하기 어려운 의무를 부과한다. 우리들은 무척 무거운 책임감을 떠맡는다. 동양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고, 서양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며, 항상 그렇듯 상충하는 두 추진력 사이에 끼인 그리스는 또다시 소용돌이를 이룬다. 이성과 경험적 추구의 전통에 따라 서양은 세계를 정복하려고 나서며, 무서운 잠재력의 충동을 받은 동양도 마찬가지로 세계를 정복하려고 달려 나간다. 중간에 위치한 그리스는 세계의 지리적이고 정신적인 교차로이다. 거대한 두 추진력을 절충시켜 총체를 찾아내는 사명 또한 그리스의 의무이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p239)

카잔차키스가 살아서 지금 그리스의 망가진 모습을 보았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듯. 과거에는 터키와의 대치 상태나 2차 대전 같은 외부적 요인을 이야기했겠으나, 지금은 외부적 요인 못지 않게 내부적인 판단착오와 부패가 나라 경제와 국민의 생활 기반을 망가뜨린 상황이니.

나에게는 부족한 바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세가지 광포한 야수는 다 같이 환희를 느꼈고, 다 같이 만족했으며, 그들의 굶주림은 다 같이 사라졌다. 영혼과의 신혼여행 기간 동안 줄곧 평생 처음으로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같은 흙으로 빚어졌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인간은 늙거나 병들었거나 불운이 닥칠 때만 그런 요소들이 내면에서 서로 분여하고 맞서 싸운다. 때로는 육체가 지배하고 싶어 하며, 때로는 영혼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고 도망치려 한다. 그리고 이성은 무감각하게 물러서서 붕괴의 과정을 지켜보고 점검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리고 튼튼할 때는 그 세 가지가 같은 젖을 빨면서 세 쌍둥이처럼 우애로 단결되지 않던가!(p239) 

나는 아직도 사춘기의 솜털을 벗지 못했던 소박한 촌뜨기였고, 처음으로 외국을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기쁨이 어찌나 컸던지 때로는 겁이 잔뜩 났다. 겁이 난 까닭은 신이란 질투심이 많은 존재들이며, 행복감을 의식하는 행위가 후브리스(교만함)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을 홀리기 위해서 나는 행복감을 줄여보려는 우스꽝스런 계획에 의존했다. (p240)

동티가 난다는 표현과 통하는 것인가. 사전을 보니 동티는 , , 나무 따위를 잘못 건드려 지신(地神)을 화나게 하여 재앙을 받는 일이라고. 여하간 귀한 아이일수록 천한 이름을 붙이고, 기쁜 일이 있을수록 공공연히 과시하는 행위를 말렸던 것들이 그에 해당한다면, 서양이든 동양이든 신은 질투심 많은 존재이고 인간의 오만함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진 듯 하다.

주어진 모든 대상들 가운데 인간의 기억력이 무엇을 선별하여 간직하는지는 하나의 신비이다. (p243) 

어찌 남게 되었는지 모를 그 기억이 마치 낙인처럼 나의 마음 안 깊은 곳에서 나를 조종한다. 어린 시절의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어른인 나를 여전히 굶주리고 목마른 존재로 몰고 가듯이. 기왕이며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 감탄과 즐거움의 기억이 남아 있기를.

신부님, 항상 불안하다는 다른 이교에 속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줄곧 싸움을 해왔어요.”  

누구와 싸웠나요?”

나는 주저했다. 갑자기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누구하고요?” 수사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다니 나에게로 몸을 수그리며 목소리를 낮춰서 물었다. “신하고요?”

.”

노인은 아무 말도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것은 병일까요, 신부님? 나는 어찌 해야 병이 나을까요?”

영원히 병이 낫지 않기를 기구합니다!”

   그는 나를 축복하려고 또는 저주하려고 두 손을 쳐들었다. “동등하거나 열등한 상대와 싸운다면 화가 미칠지어다. 하지만 신과 싸우다니, 그런 병이 낫는다면 화가 미칠지어다.”(p405)

네 마음 속에서 구원이 무르익을 때까지. 시큼한 포도가 꿀맛을 내게 될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데 신부님, 시큼한 포도가 언제 꿀맛을 내게 되는 지 어떻게 압니까?”

어느 날 아침에 잠이 깨면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게 되리라. 하지만 달라진 rjs 세상이 아니라 너란다. 구원이 네 마음 속에서 무르익었을 테니까. 그 순간에 하느님께 몸을 바치고, 절대로 신을 배반하지 말지어다.”(p410)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불안을 메꿀 무언가를 또 찾아 움직였을 때 어떤 결과가 올까. 나는 충분히 기다렸을까. 기다림이 필요할 만큼 절실하긴 했나. 모르겠다.

비록 가장 힘든 오름길에 나서기는 했어도 당신은 꼭대기에 이르려고 조급한 나머지, 날개 달린 독수리라도 된 듯 산기숡과 등성이는 거치지도 않고 곧장 목적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더 낫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은 인간일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날개가 아니라 다리가 달렸어요. 그래요. 인간의 궁극적 욕망이 성스러움이라는 건 나도 알아요. 다 좋습니다만, 우린 우선 모든 작은 욕망들부터 채운 다음에라야, 육체와 권력과 황금과 반항에 대한 열망을 경멸하는 길을 터득해야 해요. 내 얘긴, 우리들이 젊음과 남자다운 모든 욕정의 삶을 한껏 살아보고, 모든 우상들을 때려부숨으로써 그것들이 바람과 꺼풀로만 가득 찼음을 알아내고, 돌아보아도 절대로 유혹받지 않을 만큼 우선 속을 비우고 깨끗해져야 한다는 거죠. 그런 다음, 그런 다음에야 우리들은 신 앞에 나서게 되는데…. 참된 투쟁자는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p414)

그래요, 그건 사탄이지만,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 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어야 해요시간과 포만과 수련은 이런 어두운 힘을 정신력으로 바꿔 놓는답니다.”(p415)

그러면 그리스도의 종교는 또다시 도약하게 되죠. 그리스도의 종교는 지금처럼 반쪽인 영혼만 받아들이지 안고 인간 전체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그리스도의 자비심이 더 넓어지죠. 그리스도의 종교는 영혼 뿐 아니라 육체도 받아들여 신성화하고, 육체와 영혼은 적이 아니라 동지임을 깨닫게끔 그렇게 가르칠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악마는 우리들에게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합니다. 영혼 뿐 아니라 육체도 긍휼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두 야수를 화해시킬 만큼 언제 넓어질까요?”(p416)

성공 여부는 묻지 말아요. 가장 중요한 건 성공 여부가 아니죠, 그것을 더 키우겠다는 당신의 투쟁의지가 훨씬 중요해요. 신은 우리에게서 투쟁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우리들이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건 신이 따질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예요.”(p417)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나의 손에 달려있지 않으니, 그저 오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사회생활 15년 차의 지친 직장인에게 이것은, 어떤 저주인가. 이걸 믿고 몸을 던지는 절박함과 과감함을 과연, 나는 발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도 실패는 하지 않도록 이중 삼중의 안전망이 없이는 한발짝도 떼지 않는 소심하고 용의주도한 사회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로구나. 어떻게 달려나갈까.

나는 피곤해졌다. 여전히 나는 젊었고, 젊음의 끝없는 욕구가 부담스러워졌다. 젊음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할만큼 겸손하지 않고, 능력은 적지만 추구하는 바가 많다.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노력했고, 그래서 투쟁에 지친 나는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나는 우리들의 산을 마주 보고, 페스 모를 비스듬히 쓰고 한껏 웃어대는 아니 먹은 지도자들을 만나, 다시 한번 전쟁과 자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고향 땅을 밟아 기운을 얻고 싶었다.(p418)

언젠가 어느 크레타인이 나에게 말했다. “천국의 문 앞에 네가 나타났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으며, 문을 두드리지 마라. 어깨에서 총을 내려 쏘아 버려.”

정말 신이 겁을 내고 문을 열어 주리라 믿으세요?”

아냐, 얘야. 신은 겁을 내지 않아. 하지만 네가 싸움터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문을 열게 되지”(p419)

그렇다. 치열하게 싸우고 오르다 죽음을 맞는 사람은 그걸로 된 것이다. 신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듯이, 인생은 끝까지 머무르지 않은 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나는 안다.

불꽃처럼 지칠 줄 모르고

나는 타올라 소모된다.

무엇이나 내가 닿으면 빛이 되고,

무엇이나 내가 떠나면 숯이 된다.

분명히 나는 불꽃이니라.

(p439)

내 삶이 비록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언정, 그래도 삶이 거듭거듭 수없이 되돌아오기를 비노라.”(p440)

이토록 가득 찬 삶에의 열정과 긍정.

비극적 지혜의 열병에 걸린 그대는 이제 통찰력의 조각들을 하나로 짜맞추려고 노력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비극을 탄생시킨 성스러운 한 쌍이었다. 아폴론은 세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꿈꾸고, 초연한 형태로 그것들을 이해한다. 개체성으로 몸을 숨기며 그는 현상들의 광포한 바다 한 가운데 꼼짝 않고 조용히 자신 있게 서서, 꿈속에서 열망했던 큰 놀음을 즐긴다. 그의 얼굴은 빛으로 가득해서, 심지어 슬픔과 분노가 밀어닥쳐도 신성한 평정은 깨어지지 않는다.

디오니소스는 개체성을 파괴하고, 현상들의 바다에 몸을 던져 무섭고도 현란한 물결을 따른다. 인간과 짐승은 형제가 되고, 죽음 자체도 삶의 한 가면으로 보이며, 온갖 형태를 지닌 착각의 거짓된 장막이 둘로 갈라지고, 우리들은 진리와 밀착하게 된다. 어떤 진리인가? 우리들은 모두 하나이며, 우리들은 다 함께 힘을 모아 신을 창조하고, 신은 인간의 조상이 아니라 후손이라는 진실.(p443)

지식(지혜)와 본능(감정)이 한데 조화를 이루어서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있는 힘껏 살아가게 되는 것.


나의 젊은 시절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굶주린 순간에 니체는 나에게 견실하고 용맹한 자양분을 주었다. 나는 푸짐하게 기름을 발랐고, 인간이 스스로 몰락한 상태와 인간에 의해 몰락한 그리스도의 상태에 대해서 너무나 답답함을 느꼈다. 비겁한 자와 노예가 된 자와, 서러움을 받는 자로 하여금 위안을 주어 주인 앞에 참고 머리를 조아리며 (우리들이 유일하게 확신하는) 현세의 삶을 인내하게끔 만들기 위해 내세의 보상과 벌을 심어놓은 종교는 얼마나 교활한가. 나는 격분해서 소리쳤다. 현재의 삶에서는 하찮은 것을 내놓으면서 내세에서의 불멸이라는 재산을 주도록 알량하게 계산하는 주님의 계획서 같은 종교는 얼마나 약삭빠른가! 얼마나 단순하고, 얼마나 간악하며, 얼마나 인색한가! 그렇다. 천국을 바라거나 지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리가 없다. 희망의 술집이나 공포의 지하 술 창고에서 취하는 우리들은 부끄러운 존재들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며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던가! 격렬한 선지자가 나타나 나로 하여금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은 필연이었다. (p456)


동의한다!


어떤 확실성에 이를 때마다 항상 나에게는 자신감과 휴식이 곧 끝나버린다. 새로운 불안과 회의가 재빨리 확실성에서 파생되고, 나는 마지못해 과거의 확실성으로부터 나 사진을 해방시키고 새로운 확실성을 찾아내어, 결국은 새로운 확실성이 성숙하고 다시금 불확실성으로 바뀔 때까지 투쟁을 계속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불확실성은 새로운 확실성의 어머니이다.(p464)


이제 모든 젊은 날의 열정과 일들을 내려놓고 노인처럼,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고 어떤 놀랄 일도 없이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것. 그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가? 모르겠다. 이 끊임없는 불안의 이유는 무엇인가.


“ ‘여봐라, 다리가 둘이고 털이 뽑힌 수탉아! 누가 뭐라고 하든 네가 울기 전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

간호사가 웃었다. “열이 올랐을 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는군요,”

받아써요 – ‘벌레가 신의 마음 속에서 잠자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꿈을 꾸는구나.’

받아써요 – ‘내 마음을 열면 가파른 금단의 산을 홀로 오르는 인간을 만나리라.’

그리고 이것도 받아써요 – ‘ “만일 한겨울에 꽃이 피면, 어리석은 아몬드 나무야, 눈이 와서 너를 흩어 버리리라. “ “마음대로 해보라지!” 보이 올 때마다 아몬드 나무가 대답한다.’ “

그만 해요!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요. “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보고 수녀가 말했다. “아녜요, 아녜요, 이것도 적어요 – ‘이성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애걸하면 신이 문을 열어 주지 않고 빵 한 조각을 내밀어 주는 장면을 나는 즐겨 상상한다.”

그만해요, 그만해요!” 간호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녜요, 아녜요! 내가 죽더라도 그리스 사람들이 알아야 하니까 이것도 써둬요 – ‘어디를 가나, 어디에 머물거나, 나는 월계수 잎사귀처럼 그리스도를 이빨로 물고 살았다.’ “(p469)


그까짓 늙은 사기꾼 같은 죽음을 내가 왜 두려워 하겠어요! 죽음은 노새나 마찬가지이니까, 내가 타고 신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겠어요.”(p471)


이제 와서야 나는 인간이 죽음에 동의하고, 불가항력을 사랑하며, 우주의 흐름과 마음을 조화시키고, 물질과 이상이 서로 뒤쫓으며, 합치고, 잉태하고, 사라짐을 깨닫고는 내가 원하는 바가 그것이다라고 말하게끔 붓다가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상에서 태어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순수한 혼()인 붓다가 정상에 찬연하게 선다. 두려움이나 슬픔 없이 선한 판단과 자비로 넘치던 그는, 손을 뻗어 엄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구원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모든 존재들이 맹렬히 그의 뒤를 따른다. 불가항력에 아무렇게나 몸을 내맡기고 그들은 젖을 빨러 가는 염소 새끼들처럼 뛰어간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짐승이, 사람들과 짐승들과 나무들이. 그리스도와는 달리 붓다는 인간들만 골라 내지 않고, 만물을 불쌍히 여기며, 만물을 구원한다.


마음 속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힘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형성되고 사라지는 우주를 의식한다. 햇빛에 그을은 그의 머릿속에서 대기가 응결되어 성운을 이루고, 성운은 별들이 되며, 별은 씨앗처럼 지각(地殼)을 형성해서 나무와 짐승과 인간과 신들을 만들어 내고, 다음에는 불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연기로 바꿔 놓고는 꺼졌다. (p478-479)     


그들을 축복하기 이해 머리를 들며 붓다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이 가는 곳을 벌써 갔다가 돌아왔노라. 나는 그대들 또한 돌아오기를 여기 꽃 피는 나무 밑에 앉아 기다리겠다. 같은 꽃 피는 나무 밑에 우리들이 모두 함께 앉은 다음에야 내가 얘기하고 그들이 얘기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은 의미를 갖게 될 터이다. 아직도 때가 너무 이르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너희들은 저런 얘기로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러니 여행이 즐겁기를 바란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p481)


구원이란 모든 구세주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지소하며 숭고한 자유이니, 인간은 거기에 이르면 숨이 찬다. 너는 인내하겠느냐?”

아난다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너는 누가 완전한 구세주인 줄을 알겠구나….”

그는 잠깐 잠잠했지만, 나무로부터 떨어진 꽃송이를 손가락에 끼고 비틀며 말했다.

인류를 구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가 구세주이니라.”

(p484)


그날 이후로 나는 인간의 영혼이 무섭고 위험한 용수철임을 깨달았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은 모두 살과 비계 속에 굉장한 폭발물을 담고 다닌다. 더욱 나쁜 일은, 우리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만일 진실을 알게 되면 인간은 사악함과, 비겁함과, 거짓의 정당성을 상실할 터이고, 따라서 인간이 지녔다고 여겨지는 무감각과 초라한 무능력 뒤에 더 이상 숨지 못하게 되며, 비록 전능한 힘을 내면에 갖추었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을 파멸시킬까봐 두려워서 섣불리 그런 힘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만일 우리들이 악한이나 비겁자나 거짓말쟁이라면 그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편안하고 쉽게 길을 빠져 나갈 길을 택하고, 그러한 길 또한 살과 기름기만 남은 상태로 몰락할 때까지 조금씩 조금씩 기운을 잃게 내버려 둔다. 이러한 힘을 우리들이 갖추었다는 사실을 모르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만일 알기만 했더라면 우리들은 영혼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리라. 하늘과 땅 어디에서나 인간의 영혼만큼 신을 닮은 것은 다시 없다. (p491)


모든 사람들이 신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전쟁을 사는 동안 내내 치를 필요는 없다. 대부분은 한번도 내면에서 그런 전쟁을 느껴본 적이 없거나, 한때의 열정으로 여기고 한 켠에 조용히 밀어놓고 매일의 삶을 밥과 잠을 위해 필요한 노동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꽃 같은 힘을 인지한다면, 그것은 불행의 시작인지, 위대한 각성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러시아의 광활한 땅에서, 러시아의 가엾은 영혼 속에서 진행되는 처참한 실험이 지닌 범인류적이고 총체적인 의미를 나는 조금씩 조금씩 헤아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지극히 유치하고 이상향적이라고만 여겨졌던 혁명의 구호들을 나의 이성은 점차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굶주린 얼굴들과, 푹 꺼진 뺨들과, 불끈 움켜쥔 주먹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인간이 지닌 신적인 양상의 전조를 보게 되었으니, 신화를 믿고 그것을 갈망함으로써, (눈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피와 땀만으로는 부족하니) 피와 땀과 눈물을 모두 흘려 더럽힘으로써, 인간은 신화를 현실로 바꿔 놓는다.


나는 겁이 났다. 창조적인 인간의 간섭이 어떠하며, 그의 책임이 얼마나 큰 지를 나는 생전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들이 갈망하는 형태를 현실이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탓이 된다. 우리들이 갈망하면서도 충분히 힘을 들이지 않았던 대상은 비존재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원하는 대상을 우리들이 피와 땀과 눈물로 범벅을 하고 나면 그것은 형체를 갖추게 된다. 현실이란 우리들의 욕망과 고난에 종속되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p539-540)  


세상에서 가장 피에 굶주리고 육식성인 야수는 무엇인가? 하나의 새로운 신앙. 가장 채식성인 야수는 무엇인가낡아 버린 신념.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신앙의 목구멍으로 들어섰다.(p550)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현실, 이 시대가 곧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축복받았다. 매일 매일의 순간이 의미을 담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가치를 지니게 되겠지.  


모든 인간은 저마다 십자가를 지며,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어깨에 메고 한없이 가기만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는 부활할지니, 오직 그만이 행복하다. 러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중이었다. 여러 공화국과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나는 거룩한 경외감으로 전율했다. 그런 투쟁을,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런 고뇌를, 그토록 많은 희망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인간이 오래된 습성을, 과거의 신을, 과거의 사랑을 정복하기 위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비록 이 모든 대상이 한때는 인간으로 하여금 높이 오르도록 부추기는 정신이기도 했었지만, 그것들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납덩이처럼 무거운 짐이 되어 길을 반쯤 가다가 주저앉게 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창조의 숨결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매달렸다.(p576)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투쟁자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고, 사람들에게 불을 붙이는 불길에만 신경을 쓴다는 끔찍한 비밀을 알아내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지 모른다. 그가 가는 길을 해골을 엮은 묵주처럼 인간을 꿰뚫고 지나가는 붉은 줄이다. 나는 붉은 줄을 따라가는데, 비록 내 두개골을 깨뜨리고 때려 부수더라도 세상의 모든 현상 가운데 오직 그것만이 나의 관심을 끈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나는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들은 인간의 한계점 내에서 일하고 의무를 수행해 나가도록 하자. 언저리에 이르면 입을 벌린 심연이 무서워 피가 얼어붙을 지 모르므로, 우리들은 한계점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언저리에는 세상을 불어 사라지게 하는 위대한 마술사인 붓다가 차분하면서도 독을 품은 미소를 머금고 서서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들은 세상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리스도가 세상을 어깨에 메고 천국으로 옮겨 놓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들은 그것이 여기에서 우리들과 함께 살고 투쟁하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도예가 진흙을 사랑하고 탐하듯 세상을 사랑한다. 우리들에게는 가지고 일할 다른 재료가 없고, 씨 뿌려 거둘 혼돈 말고는 단단한 다른 밭이 없다. (p588)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란 우리들이 충분히 갈구하지 않았으며, 비존재의 음산한 문턱을 지나 전진하기에 충분할 만큼 우리들의 피를 쏟아 붓지 못한 무엇이다.(p604)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요소는 여행과 꿈이었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내 투쟁에 도움이 된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나는 아마 호메로스와, 붓다와, 니체와, 베르그송과, 조르바를 꼽으리라. 첫번째 인물은  -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운을 되찾게 하는 광채로 우주를 비추고 태양처럼 평화롭고 찬란하게 빛나는 눈이었으며,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빠졌다가 구원을 받는 한없이 싶은 까만 눈이었다.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얻지 못했던 나를 괴롭히는 철학의 온갖 문제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나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으며,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P619)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시대에 태어나는 저주를 받으라는 이상한 악담이 오고 간다. 우리들은 과거에서처럼 선과 악 사이에서 뿐 아니라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일이지만 여러 미덕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란한 실험과, 모험과, 충돌로 가득 찬 중대한 시기에 태어났다. 낡은 기존의 미덕은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현대인의 종교적, 도덕적, 지적,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인간의 영혼은 더 커진 듯싶고, 이제는 옛날의 틀에 맞지 않는다. 힘은 모두 소모되었지만 조금 더 오래 우리의 삶을 다스리려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과거의 전능했던 신화와, 아직은 엉성하고 조직도 없지만 우리 영혼을 지배하려고 싸우는 새로운 신화 사리에 내란이 일어났으니, 시대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이 내면에서 의식을 하든 못하든 간에, 우리 시대의 심장부에서 무자비한 내분이 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하는 모든 인간은 오늘날 시대의 극적인 운명에 고문을 당한다. (P624)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자품에서 내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았다. 진실한 작가와는 달리 나는 구원을 추구하며 고통스럽게 투쟁하는 인간이어서, 미사여구를 지어내거나 멋진 운을 맞추려는 데서는 기쁨을 얻지 못했으며, 나 자신의 내적인 암흑으로부터 해방되어 암흑을 빛으로 바꿔 놓고, 내면에서 고함치는 무서운 조상을 인간으로 바꿔 놓고 싶었다. 나는 모든 역경을 이겨 내는 인간 영혼의 능력을 보며 용기를 얻으려 했고, 그런 까닭에 가장 숭고하고 힘든 시련을 성공적으로 치러 낸 위대한 인물들을 소생시키기를 원했다. 어렸을 적에 내 눈 앞에서 벌어졌던 바로 그런 싸움이 아직도 끊임없이 내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또한 쉴 새 없이 전 세계에서도 터져 나온다는 현실…. 나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알았다. 그것은 내 삶의 꺼지지 않는 주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모든 작품에서는 두 명의 투쟁자가 항상 주인공이었다. 내가 글을 썼다면, 투쟁을 돕는 유일한 수단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크레타와 터키, 선과 악, 빛과 암흑은 내 아픔 속에서 한없이 싸웠고,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의식하게 된 내 글쓰기의 목적은 크레타와, 선과, 빛을 최선을 다해 도와서 이기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내 작품의 목적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구원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이러한 투쟁이 어찌나 심했던지, 그리고 도움의 필요성이 얼마나 뚜렷했던지, 나의 개인적인 투쟁과 현대세계의 투쟁을 곧 동일시하데 된 시대에 태어났다. 세계는 과거의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나는 어둠의 조상들로부터, 이렇게 세계와 나 둘 다 똑같이 암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투쟁했다. (P628-629)


꽃과 새와 사람을 수놓은 휘장 정말로 그것이 신이리라. 내가 한때 믿었듯이 세상은 신이 몸에 걸친 의상이 아니라, 그것은 신 자신이다. 형태와 실체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나는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마치 약혹반지를 일허버렸다고 생각해서 초조하게 여기 저기 찾아보지만 손가락에 끼었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약혼자처럼, 바로 내 앞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신을 찾아다녔음을 깨달았다. 고독과, 침묵과, 에게해는 남모르게, 열심히 나와 함께 일을 했다. 나와 함께 일하던 시간 또한 내 위로 흘러갔고, 내 몸 속의 씨앗이 영글었다. 새와 별들과 더불어 나는 영원한 수레바퀴에 몸을 묶었고, 평생 처음으로 무엇이 참된 자유인지를 알았으니, 그것은 신의 밑에서, 그러니까 조화의 밑에서 스스로 멍에를 지는 의무였다.(P650)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이미 어떤 하나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선택했다. 내 앞뒤의 모든 다른 길은 막혔다. 나는 고정된 습관과, 고정돈 공감과 반발에 익숙해졌고, 이제 불쑥 돌아가서 싸움터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들어선 길을 따라 끝까지 가야만 했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상당히 유리했다. 나는 짐을 벗었고, 드디어 마음 놓고 내가 바라던 대로 노래하고, 웃고, 쉬고, 놀면서 가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누구 앞에서도 더 이상 수치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두려워할 사람들은 누구인가?(p661)


죽음을 물리칠 힘이 없음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인산의 보람은 승리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비롯한다. 더욱 어려운 얘기지만, 또한 나는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조차 보람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인간의 보람은 오직 한가지, 어떤 보상도 받지 않으며 용감하게 살다가 죽음으로써 얻는다. 그리고 또한 나는 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성이 등골을 오싹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자부심과, 남자다운 용기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더욱 힘든 세번째 조건도 알았다.(p670)


내 젊은 시절은 불안과 악몽과 회의 뿐이었고, 성숙은 절름발이 해답에 지나지 않았다. 별과, 인간과, 사상으로 눈을 돌려 봐도 혼돈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빨간 발톱이 달린 파랑새인 신을 찾아냈을 때 내가 겪어야 했던 고뇌! 길을 하나 골라 끝까지 따라가서 보니 심연이었다. 겁이 나서 돌아선 내가 다른 길을 따라가서 보니, 끝에는 또다시 심연이었다. 다시 물러나 새로이 여행을 해도 똑 같은 심연이 불쑥 앞에서 입을 벌렸다. 이성의 모든 길은 나를 심연으로 이끌어 갔다. 내 젊음과 성숙은 허공에서 전율과 희망의 두 말뚝 주위를 맴돌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자 나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조용히 심연 앞에 선다. 나는, 아니 내가 아니라 내 손으로 빚은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고, 더 이상 자신을 부끄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심연을 차분히 맞게끔 그를 창조했고, 그를 창조하며 나는 그와 닮으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이 창조되는 중이었다. 나는 내 모든 열망을 오디세우스에게 맡겼으니, 그는 인간의 미래가 흘러 들어가도록 내가 파내는 틀이었다. 내가 열망했으나 달성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는 달성하리라. 그는 미래를 창조하는 어둡고 밝은 힘들을 끌어내는 마력이었다. 믿음은 산을 움직이니, 그를 믿으면 그가 오리라. 누가 오는가? 내가 창조한 오디세우스가. 그는 원형(原型)이었다. (p677)


모든 순수한 인간은 그의 내면에, 가장 깊은 그의 마음 속에 신비한 중심을 지녔으며, 다른 모든 만물이 그 주위를 맴돈다. 이 신비한 소용돌이는 그의 사상과 행동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우주 조화를 발견하거나 창조를 도와준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중심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이나 아름다움이 중심이며,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에 대한 갈망이나 황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중심이다. 그들은 다른 모든 대상의 상대적인 가치를 검토하고, 그것을 중심되는 정열에 종속시킨다. 절대적인 군주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린다고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불운하다. 다스림을 받지 않는 무질서한 삶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p688)


당신이 나에게 맡긴 책임은 힘에 겨워요, 메네기. 인간의 책임이 조금 덜 고달프면 안되나요?” 

그래도 되기는 하겠지만, 너하고 나는 달라. 세 종류의 인간이, 세 가지의 기도가 존재하니까.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임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선택은 스스로 하라구!”(p713)


모든 나무는 십자가를 만들 수 있기에 모든 나무가 참된 십자가에서 온다. 마찬가지로 모든 육체는 활이 될 수 있기에 모든 육체가 거룩하다. 내 생애 전체는 비정하고 만족을 모르는 손에 들린 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들이 얼마나 자주 그 활을 부러질 지경으로 당기고, 또 힘껏 당겼는가! ‘부러져라!’ 그때마다 나는 소리쳤다. 어쨌든 당신은 나에게 선택하라고 명령했으며, 할아버지시여, 나는 선택했다.(p714)

    

3.     내가 저자라면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작가노트와 프롤로그를 다시 펼쳤다. 이거 참 멋진 문구, 인용하기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던 글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책을 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 받는 것이 싫어 백지상태에서 책을 보고, 그 후 작가든, 작품이든 다른 사람의 평이나 정보를 참고하는 편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작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한 후 읽는 것이 이토록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인간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모든 인간은 십자가를 지고 그의 골고타를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걸음 나아가다가 여로의 중간에서 숨을 몰아 쓰러지기 때문에 골고타의 정상에, 그러니까 의무의 정상에 이르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다른 자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처형이 두려워 그들은 마음이 약해지고, 부활에로의 길이 십자가 뿐임을 모른다. 다른 길은 없다. (p7)


다른 길은 없다. 이 단호하고 엄격한 선언에 나는 잠시 기가 질린다. 올라본 사람,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그이기에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책을 읽는 내내 그가 빛나는 젊은 시절을 영혼의 전쟁에 저당잡히는 것 같아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가 정리한 자신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밟아 본 후, 아마도 죽음을 예감하고 썼을 이 비장한 프롤로그를 다시 보며 나의 마음은 흔들렸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나는 두더지처럼 내 집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지쳤거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피곤하지 않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p11. 프롤로그)


러니 장군이여, 내 말을 듣고 심판하라. 내 삶의 얘기를 듣고 할아버지여,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싸웠으며, 만일 내가 다쳐 쓰러졌으며, 남들이 내 고통을 알지 못하게 숨겼으며, 만일 적으로부터 내가 한번도 도망친 적이 없었음을 알겠다면…..

나에게 축복을 내리소서!(p.20, 프롤로그)


그의 책 제목을 번역하면서 영혼의 자서전으로 바꾼 것은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절할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원제인 Report to Greco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부제가 하나 더 있었어야 했다. 책만을 읽어서는 이 내용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할아버지,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제목만이, 아마도 카잔차키스가 마지막 순간에 동병상련의 존재로서 선조로서 영혼의 투쟁을 고백하는 대상, 엘 그레코의 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실마리인 듯 하다. 물론 엘 그레코의 작품과 일대기를 꿰뚫는 사람이라면 유추해낼 수 있는 내용들이 본문 속에 들어있긴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으려나?


그가 예수, 부처, 니체, 베르그송, 레닌, 조르바 등 그에 인생에 영향을 미친 신과 영웅들을 모두 되짚어 본 뒤 마지막 고해성사를 들어줄 대상으로 주님을 찾지 않고 조르바에 기대지 않고 화가 엘 그레코를 찾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각자 글과 그림이라는 대상을 통해 영혼의 투쟁을 벌였던 예술가였기에,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엘 그레코의 인생에서 보았던 것이겠지?

영혼의 자서전은 특별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분단 나누기를 시도하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따라가며 중요했던 장소와 인물들을 따라 가며 그 여정을 기록하는 형식이다.


작가노트

프롤로그

조상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초등학교

외할아버지의 죽음

크레타와 터키

성인의 전설

도피하려는 열망

대학살

낙소스

해방

사춘기의 어려운 문제들

에이레 아가씨

아테네

크레타로 돌아오다 크노소스

그리스 순례

이탈리아

나의 벗 시인 아토스 산

예루살렘

사막 시나이

크레타

파리 위대한 순교자 니체

나의 병

베를린

러시아

카프카스

탕자 돌아오다

조르바

오디세이아의 싹이 내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

크레타의 섬광

에필로그

영혼의 자서전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

니코스 카잔차키스 연보

 

사제로서의 부름을 고민하며, 수도원들을 방문하던 그의 순수해서 교만한 방황을 보며, 나는 그가 빛나는 젊은 시절을 영혼의 전쟁에 저당 잡힌 듯 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수도원 순례의 끝, 시나이 산의 수도원에서 크레타섬 출신의 수도승을 만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고, 그가 모든 경험 뒤에 온 순수한 공백 상태에서 전해준 말이 내 가슴에도 들어왔다


그래요, 그건 사탄이지만, 유혹을 정복할 방법은 하나 뿐이니 그것을 껴안고, 맛보고, 경멸할 줄 알게 되어야 해요시간과 포만과 수련은 이런 어두운 힘을 정신력으로 바꿔 놓는답니다.”(p415)


그토록 먼 길을 떠나와서, 궁극의 길로 통할 것 같았던 시나이산의 수도원에서, 영혼의 여정 제 1장을 닫고 새로운 장을 열게 해줄 가르침을 하필 같은 흙에서 나고 자란, 이제는 갈 길을 알고 죽음을 맞이할 늙은 수도승의 입을 통해 전달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논픽션과 픽션을 넘나드는 이 여행기에서, 작가가 결국 내 눈앞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지나친 해답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넣은 필연이리라 생각된다.


당신이 나에게 맡긴 책임은 힘에 겨워요, 메네기. 인간의 책임이 조금 덜 고달프면 안되나요?” 

그래도 되기는 하겠지만, 너하고 나는 달라. 세 종류 인간이, 세 가지의 기도가 존재하니까. 첫째, 나는 당신이 손에 쥔 활이올시다. 주님이여,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마소서, 주님이여. 나는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 주소서. 주임이여,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겠나이까!

선택은 스스로 하라구!”(p713)


나는 어떤 기도를 하는 사람인가. 화살이 수없이 부러져도 당겼던 그와 달리 나는 어떤 선택을 했나. 어떤 선택을 더 하게 될 것인가? 젊음이 버겁고 인생이 성공 내지는 생존을 행한 일직선의 고속도로여야 하는 줄 알았던 때 나는 첫 번째 기도를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끝없는 오름길에 질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고치 속의 평화를 원하는 내가 한 기도는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이었을 게다. 인생을 일관성 있게 하나의 기도로 가는 꿋꿋함을 나는 가지지 못했다. 부러지면 좀 어떠냐는 담대함과 용기를 가져볼 때가 온 것인가? 가보자. 시작선에서 알 수 없다 하여도, 괜찮다. 이것도 한참을 가고 나서야 깨닫는 기도일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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