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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18일 12시 00분 등록

현대의 영웅에 대하여


영웅이라는 단어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의 할머니를 떠올린다. 성인이 되어서, 자신 앞에 깊숙이 살아 숨쉬는 부모와 가족과 먼 먼 조상들까지 발견하고 놀라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의식하든 하지 않든 나는 나 혼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모는 너무 가깝다. 한때 나의 모든 것이었고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인 적도 있었을 아버지나 어머니를 다시 냉정히 돌아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늙어 왜소해지고 힘이 빠져갈 부모는 내가 작은 만큼 커 보였던 것이고, 이제 내가 성숙해가는 만큼 본인의 욕구에 노골적인 노인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그것도 눈을 돌릴 수도 없는 근거리에서 보여줄 것이므로, 나는 아직 그들에게서 거리를 둘 방법을 찾을 수 없다.


할머니는 다르다. 할머니에게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다.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은 고난과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젊은 시절이 있다.


내가 아는 할머니의 인생은 열네살에 시작한다. 그녀가 지금은 가볼 수도 없는 멀고 먼 북쪽 지방, 강씨들의 집성촌에 민며느리로 들어온 것이 그 나이였다. 혼인하고 얼마나 남편과,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장남은 대체로 선생이 되어야 했던 집안 내력에 따라 할아버지는 서울로 유학을 가버렸으니까. 할머니의 십대는 어렵기만 한 시부모님과 집을 건사하며 살아낸 애달픈 삶이었을 것이다.


6.25가 터지기 직전, 이미 숙청이 시작된 고향을 등지고 네 살 아홉 살 난 두 아이와 싱거 미싱 하나를 수레에 담아 피난을 떠나면서 할머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서울에 와서 남편을 만나기는 하였을까? 같이 지내기는 하신 걸까? 할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를 아끼셨다. 아니, 어떤 것이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 하시는 것은 들은 적이 없다. 늘 지금, 현재 해야 하는 일에 온 힘을 쓰고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피난 내려와 처음 하신 일이 묵장사라 하셨다. 그것도 아버지가 말해서 알았다. 할머니가 장사를 위해 식혀둔 묵을 배고플 때마다 양껏 떼먹다 혼났던 기억, 같이 묵장사를 하던 아주머니의 아들은 혼날까 봐 늘 묵에 손도 못 대고 배를 곯다가 그만 굶어 죽었다고 하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일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바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가새로 귀신같이 실밥을 따던 모습이다. 어찌 어찌하였는지 할머니는 실향민들이 터를 잡은 동대문 시장에서, 작업복이라 부르던 남자바지와 잠바, 조끼 같은 옷들을 만들어 파는 도매 장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 난리 통에도 버리지 않고 꼭 끼고 온 미싱이 어찌 됐든 제 역할을 한 셈이다.         


동대문 시장, 미로 같은 상가를 한참은 헤메야 도착하는 융창사라 이름한 할머니의 가게를 드나든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이 가게를 세 아이를 키우며 일궈냈고, 한참 장사를 하던 시절에는 공장까지 운영하며 서른 명이 넘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셨다. 지금 그때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은 공장 식구들과 가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뿐이다. 고단한 일상을 잊고 하루 소풍을 나온 듯 했다. 정릉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커다란 능 앞에서 공장 식구들과 돗자리를 펴놓고 도시락에 과자에 이것 저것 음식을 늘어놓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의 낡은 흑백 사진 한 장이 달랑 남아있다.   


할머니는 일흔이 되어서야 새벽에 나가서 다섯 시에 마감하는 가게일을 삼촌에게 완전히 넘겨주고 그만두셨다. 이 오랜 세월 동안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순간은 몇 번 안되었던 듯 하다. 작은 집을 두고 할머니와 그 자식들은 뒷전이었던 터라 그랬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오빠를 낳고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했다. 원망도 많았을 텐데, 할머니는 작은 집도 건사하셨다. 작은 집의 삼촌과 고모들도 나는 그냥 친고모, 삼촌인 줄 알고 자랐다.


할머니는 아흔 여섯에 돌아 가셨다. 가기 전 몇 달, 기억과 기력이 모두 쇠하여 안타깝긴 했지만 그래도 큰 병 치레 없이, 큰 소리 내는 일 없이 늘 웃는 낯으로 지내다 가셨다. 저 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다들 미륵 같은 양반이라고 했다. 모진 삶이었을 텐데, 힘들다 어떻다 표현도 없고 그래, 그래, 괜찮어, .’ 그 양반 옆에 있으면 정말, 뭐든 게 괜찮았고 모든 게 제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처럼 아무런 후회도 푸념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냥 지금, 여기만 존재한다는 듯, 온전히 현재에 사시고 용감하게 처한 현실을 부딪쳤던 그 분이 내게는 영웅이다. 불평할 줄 몰라서, 안 힘들어서 그러셨던 것은 아닐 게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책임을 다하셨던 그 분으로 인해 가능했던 삶이 얼마나 되는 지 생각해본다. 그랬음에도 말이라도 본인의 덕을 내세운 적 한번 없었다. 그냥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는 듯,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 사셨다. 현실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인생, 현재에 가장 충실하게 매일 매일을 산 그녀, 세상에서 가장 쿨했던 할머니를 통해 나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의 영웅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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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17:42:08 *.62.167.27
저의 할머니도 강씨인데...^^ 가새를 쓰셨군요. 울 할머니는 가시개를 들고 이불홑청 따셨는데...종종걸음님 마음 속의 영웅이 참 정겹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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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22:08:18 *.20.137.74

피라미드 위에 든 별밤이 넘 따뜻하네요. 할머니 생각하는 손녀들의 밤인가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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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23:32:54 *.62.160.137
할머님 분명 별이 되셨을 겁니다. ^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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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03:36:43 *.185.21.47

현재를 가장 충실히 매일매일을 사신 할머님.

과거도 미래도 아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살아가신 할머님.

우리 가족, 주위 이웃들이 영웅이지요.

주어진 여건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국민교육헌장>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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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1 23:32:03 *.100.185.237

멋진 할머니를 두셨군요.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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