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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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에 시방 백설(白雪) 만건곤(滿乾坤)합니다. 당연 차는 산방으로 오르내릴 수 없고, 나는 엉덩방아 찧으며 걷는 즐거움을 아이처럼 즐기고 있습니다. 숲 생활 3년 차에 이제 그대 염려하시는 웬만한 불편을 나는 담담이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나 봅니다. 이를테면 먼 길 다녀와 늦은 밤 차가워진 방에 불을 지피는 일이 처음엔 다소 서글펐으나, 이제는 그 시간마저 당연한 귀소의 증거절차처럼 푸근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일상과 불편이 그렇게 담담한 삶의 일부로 체화되었건만, 유독 끼니를 챙기는 일은 쉬이 친해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가도 때 되면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작업의 흐름도 끊기기 쉽습니다. 가끔은 그런 단속(斷續)이 속 상하곤 합니다. 이따금 ‘인간은 왜 엽록체를 만들지 못했을까? 풀처럼 나무처럼 광합성을 통해 먹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공상을 하는 날도 있습니다. 내게는 여전히 번거롭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어머니와 아내 밥지어 상에 올리는 일이 그만큼 귀한 일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이 그렇게 펼쳐지자 문득 ‘짓다’라는 동사에 담긴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농사를 짓다.’ ‘집을 짓다.’ ‘밥을 짓다.’ … 모두 짓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농사하기나, 집 세우기, 밥 만들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짓는다는 표현만이 적확합니다. 짓는다는 오래된 표현 속에는 깊은 속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니 짓는다는 표현은 홀로 할 수 없는 일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내가 비록 홀로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사는 결코 홀로 완성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먼저 씨앗이 있고, 햇빛이 있고 구름이 있고 물이 있고, 무수한 곤충이 있고 땅이 있고 퇴비로 돌아가기 위한 죽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농사입니다. 집을 완성하기 까지 단지 돈만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재료가 있어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가 있어야 합니까? 밥 역시 그렇습니다. 밥은 단지 쌀과 물과 솥과 적당한 열기가 있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쌀 한 톨에 담긴 봄날부터 가을까지의 깊은 우주적 작용과 농부의 노고가 없다면 어찌 밥이 지어지겠습니까? ‘짓다’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 아닌 것에 의존하며 은혜를 입어 완성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깊이 새겨보면 알게 됩니다. ‘짓다’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관계망이 얼마나 심오한 상호성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부정적 느낌을 불러 세우는 ‘죄를 짓다’라는 말에 ‘짓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이유 역시 쉽게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죄 역시 타자에게 부과하는 크고 작은 부담이거나 상처를 내가 만드는 행위이기에 ‘짓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결국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어떤 ‘지음’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복을 지을 것인지, 죄를 것인지는 내게 달려 있음도 알게 됩니다. 자명하게도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른 생명에게 부담이거나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이 그렇게 짓는 행위인 것입니다.
곧 다가오는 새해, 나와 그대의 걸음이 ‘복을 짓는 걸음’이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이 밤 내리는 저 눈은 겨울 가뭄을 풀기 위한 구름의 걸음이 아닐까 여기게 됩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눈처럼 그대 사무치게 보고 싶은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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