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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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새해가 열리던 날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모로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선을 따라 창틀을 액자로 쓰고 있는 옹달샘 위의 느티나무 줄기와 가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도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발끝을 채우는 아랫목의 온기가 참 좋았습니다. 가만히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마흔 다섯의 아침이구나. 서른이 되던 해에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나이가 내게 당도한 아침이구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미 너무 어리지 않은 나이여서 실체로 닿기 어려운 거친 욕망은 대부분 내려놓은 나이. 아직 너무 쇠하지 않아서 여전히 포기하지 말아야 할 가치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나이. 너무 좁지 않아서 이쪽과 저쪽을 양철판처럼 튕겨내지 않고 오히려 가슴에 품어 새롭게 싹 틔울 수 있는 나이! 아, 내가 지금 내 삶의 그 국면을 맞았구나.
쌀을 앉혀놓고 간단히 집안을 치웠습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붉은 색 시집을 다시 펼쳤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시인이 12년 만에 새로 지어낸 시집입니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시인은 한때 사형수였습니다. 7년 넘는 독방생활 끝에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지금은 세계를 주유하며 생명과 평화활동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삶과 철학과 사상에 정직했던 시인이기에 그의 이런 활동을 두고 말이 쉬운 누구는 전향을, 죽음의 문턱 앞에 단 한번도 서본 적이 없는 누구는 변절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숲을 통해 생명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과 건강한 공동체의 상을 그려 그 길로 나서게 된 나는 시인이 생명 평화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했습니다. 이 시대 점점 더 가속화되는 ‘풍요 속의 가난’, ‘현란함 속의 어둠’, ‘전 지구적 야만의 확산’을 해결할 거의 마지막 희망이 바로 생명에게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집에는 시인의 성숙한 지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꼿꼿한 사랑의 정신이 또박또박 새겨 있습니다. ‘악세히르 마을’ 입구 어느 묘지의 묘비에 새겨진 3∙5∙8… 같은 숫자들을 보면서 지은 ‘삶의 나이’라는 시에 오랜 시간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시인은 그 마을 묘비에 새겨진 숫자를 궁금해 하다가 마을 노인을 통해 그 의미를 알게 됩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묘비에 나이를 새기지 않는다오 /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오 / 사는 동안 진정으로 의미 있고 사랑을 하고 / 오늘 내가 정말 살았구나 하는 / 잊지 못할 삶의 경험이 있을 때마다 / 사람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금을 하나씩 긋는다오 / 그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문기둥의 금을 세어 / 이렇게 묘비에 새겨준다오 / 여기 묘비의 숫자가 참삶의 나이라오”
아내 역시 10년 가까이 딸 녀석의 문기둥에 금을 그어오고 있습니다. 딸 녀석의 키를 기록하는 표식입니다. 아내 덕분에 나 역시 자식의 물리적 성장을 기록하여 바라보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을 통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갖게 됩니다. 딸 녀석, 아니 나를 비롯한 우리가 시인이 말하는 참삶의 나이를 헤아려보는 성찰을 기록해보면 어떨까? 살아온 세월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나이보다 정말 살았구나 말할 수 있는 경험과 시간의 기록으로서의 나이!
참 좋은 나이 마흔 다섯이 되던 날 아침, 오두막 문 기둥에 금 하나 긋는 한 해 보내고 싶은 욕심이 조용히 내게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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